안녕하세요! 드디어 고수전쟁까지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고구려 말기 내용은 대중적으로 관심도가 높은 부분이죠? 이제는 고구려 말기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수나라의 1차 침공
영양왕은 590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 이미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을 완료한 상황이었고, 이에 선왕인 평원왕이 잔뜩 경계를 하며 대비하던 시기였죠. 영양왕은 일단 수나라에 조공을 하면서 분위기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영양왕 9년인 598년, 영양왕은 직접 1만의 말갈 군사를 이끌고 수나라의 요서 지방을 침공합니다. 사서에 자세한 전후사정은 나와있지 않지만, 이미 이 시기에 고구려는 수나라의 야욕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으로 보이죠. 서로 첩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것이고, 영양왕은 차라리 선제 공격을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규모로 보았을 때 진짜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려던 것은 아니고 정예 기병으로 수나라의 전진 기지를 초토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수서와 삼국사기에서는 수나라가 이겼다고 나오긴 하는데, 그 이후 기록을 보면 조금 의심되긴 하죠. 아무튼 수 1대 황제인 문제는 극대노하게 됩니다. 문제는 5남인 한왕 양량을 원수로 임명하며 무려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지시합니다. 이게 그 이후의 정신 나간(?) 수나라의 원정군 규모 때문에 그냥저냥한 규모로 보이지만, 30만이 동원되는 원정이면 사실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큰 규모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나라의 1차 침공입니다.
다만, 이 전쟁은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그리 유명하지는 않습니다. 삼국사기와 수서에는 그저 장마와 전염병으로 인하여 육군의 군량이 끊기고 많은 군사가 죽었으며, 수군은 풍랑을 만나 배들이 많이 침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군사들이 죽고 소득 없이 퇴각했다고 하죠. 물론 이걸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고구려가 수나라의 어려움을 틈 타 여러 전투에서 수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보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이죠. 이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후에 영양왕이 매우 두려워하며 자신을 낮추고 사죄하였다고 하는데, 수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물러간 정황과 그리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조공 관계를 다시 맺으면서 전쟁을 일단락하려던 시도 정도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같이 고구려를 침공하자고 할 때도 수나라가 거절하는 기록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영양왕은 수나라의 1차 침공 이후에 백제와 신라 전선에 좀 더 신경을 쓰며 여러 성들을 빼앗기도 합니다.
2.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치광이, 수 양제 양광의 등장
다음 타자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 누구냐고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수 양제입니다. 수 양제의 아버지인 1대 황제 문제는 비록 고구려 원정에 실패했지만 상당한 성군이었고, 이때 수나라는 상당한 번영을 누립니다. 당시 수나라의 인구를 4천만 명 이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을 정도입니다. 고구려 원정은 실패했지만, 상당한 고난이도인 베트남 원정에는 성공하기도 하죠. 아무튼 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양제는 진짜 싸이코패스였습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꽤나 나올 것 같습니다. 패륜, 학살, 음탕, 방탕 같은 단어들이 모두 사실과 부합하는 황제지요. 형과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긴 한데 뭐, 진짜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각종 중상모략으로 황제에 오른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는 아버지인 수 문제가 가까이 하던 진귀인이라는 여인을 겁탈하다가 실패하여 진귀인이 울면서 수 문제에게 도망가자 바로 황궁을 포위하고 아버지와 형을 제거한 후 황제에 오릅니다. 그 직후 진귀인을 자신의 여인으로 취하죠.
양제는 607년에 직접 동돌궐로 행차하는데, 하필 이때 고구려의 사신과 직접 마주칩니다. 양제는 고구려의 사신에게 협박을 합니다. 왕이 직접 와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줘팰거다~와 같은 말이었죠.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3. '진짜 백만대군', 수나라의 2차 침공
결국 611년에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삼국사기에 분명하게 113만 38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군량 수송을 맡은 자는 그 두 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선뜻 믿기지가 않는 규모입니다. 과연 그 규모는 진짜일까요? 오늘은 수나라 2차 침공의 믿기지 않는 병력 규모를 탐구해보는 데 집중해보겠습니다.
우선, 수 양제의 조서에서 수나라 군은 좌군 12군과 우군 12군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천자를 호위하는 6군을 포함하면 총 30군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장교를 제외한 사병만 보자면 1개 군은 기병 40대로 구성되어 있고, 기병 1대는 100명이라 하였으므로 1개 군의 기병은 4천 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병은 80대라고 하였는데, 기병과 같이 1대가 100명이라고 보면 8천 명이지만 보병의 1대를 200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서 이 경우에는 1만 6천 명이 됩니다. 보수적으로 8천 명으로 잡는다면 1개 군의 보+기 병력은 1만 2천 명입니다. 여기에 군 편제 상 공병, 군악대, 하급 장교 등이 1개 군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수서에 따르면 1개 군이 2만 명을 조금 넘는다는 기록, 2개 군을 합해 5만의 군대를 이끈다는 기록 등이 보이므로 1개 군의 병력을 모두 합하면 2만~2만 5천 명 정도가 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보+기 병력을 1만 2천으로 본다면 2만 명이, 보+기 병력을 1만 6천으로 본다면 2만 5천 명이 조금 더 합리적일 가능성이 높겠죠.
1개 군을 2만 명으로 가정한다면 총 30개 군의 병력은 60만 명이 되고, 2만 5천 명으로 가정한다면 75만 명이 됩니다. 물론, 1개 군을 3만~3만 5천 명 정도로 보는 견해도 있고, 30개 군이 아니라 36개 군이라는 견해도 많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총 병력이 100만에 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 수군(水軍)을 포함하지 않았으니, 보통 그 규모를 5~7만 명으로 봅니다. 이는 다음 편 정도에 영류왕을 이야기 할 때 좀 더 자세히 다룰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무튼 종합하면 수나라 군대의 침공 규모를 가장 적게 잡는 견해도 대략 65만 명 정도로 보고, 100만 명에 근접하거나 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상당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113만 3800명이 끝자리까지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나라가 송두리째 뒤흔들릴만큼 어마무시한 규모임은 분명하죠. 이후 우중문과 우문술의 평양 직공 별동대만 30만 명이라는 점을 보면, 그 규모가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부정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근대 시기에 그런 군대를 어떻게 동원하냐 나라 망할 일 있냐' '그거 군량 보급도 안된다' '비상식적인 그런 동원령이 있으면 반란 일어난다' 등등입니다. 사실 이런 논리들은 지극히 합리적입니다만, 상대는 수 양제입니다. 합리적인 견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인물이지요.
그러면 나라 망한다 --> 진짜 망함
군량 보급도 못한다 --> 진짜 못함
그럼 반란 일어난다 --> 진짜 일어남
등등...
양제의 조서 중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4. 소결
이번엔 수 1차 침공을 간략히 짚고 넘어갔고, 2차 침공의 병력 규모에 대해 사서의 내용을 자세하게 탐구해 보았습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엄청나게 신경쓰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죠.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나라의 2차 침공과 같은 병력 규모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요.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최대 규모의 병력 동원이라고도 하죠. 고구려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황에 놓입니다. 그런데 살짝 스포를 하자면 수 양제는 이렇게 미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단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합니다.
다음 편에는 그 유명한 을지문덕에 대해 다루어 보고, 분량이 가능하다면 2차 침공에서의 영류왕 고건무(그땐 왕이 아니었죠)까지 다루어 보고 만약 분량이 너무 넘친다면 영류왕 고건무의 대활약은 그 다음 편으로 넘겨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5-05-19 22:5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