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친구가 있고 그것은 그녀도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린 첫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취향을 물어보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단발머리를 좋아한다 말했다. 그 고백에 내 친구는 갑자기
“야 나 나 단발머리 예쁜 언니 한 명 알아.”
“오 너랑 잘어울릴 것 같아.”
“그 언니 이 근처라는데 잠깐만!”
나는 내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할 기회도 없었다. 사실 아직 밝히기 민망한 단계고 서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런 흐름으로 십년 지기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친구가 신났나보다. 나는 만류했지만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친구가 원하는 것은 나와 그 언니의 매칭이 아닌 자신의 재밋거리 찾기 였으므로 친구는 기어코 그 단발머리의 언니를 불렀다.
그녀가 도착한 후 적당한 소개 끝에 우리 셋은 말이 없어졌다. 우리 셋 사이에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공기가 있었다. 눈치를 보던 친구는 자기가 주선자 비슷한 포지션을 취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취한 친구는 계속 우리 둘을 엮으려고 썩 유쾌하지 않은 말들을 이어갔다. 내 외모와 조건 얘기, 그녀의 관심사와 스타일 등 그녀와 나는 계속 의도치 않은 아웃팅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그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히 그녀를 알고 싶었다. 첫 눈에 반한 것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를 뜬다. 담배나 피고 온다고 말하고 나왔다. 담배 불을 붙이는 순간 술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그녀가 나왔다. 나는 일단 불이 잘 붙게 한모금을 빨고 연기를 내뱉으며,
“당황스러우시죠? 죄송해요. 쟤가 저런 애가 아닌데.”
그녀는 백을 뒤적이다 그녀의 말보로를 꺼내며,
“저도 알아요. 그런데 쟤가 술이 취하면 조금 진상이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그녀는 손으로 바람을 막는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짧아진다. 담배도 점점 짧아진다. 우리는 어색히 담배를 피며 군중들을 보는 듯 하늘을 보는 듯 시선을 남겨두지 못한다. 내 담배도 다 태우기 전 그녀는 담배를 끄고,
“그럼 전 가볼게요.”
라고 말하며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친구를 잘부탁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내가 뭐라 답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가버렸다.
다음날 나는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훑어본다. 전에 그녀가 같이 나왔던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뭐에 홀린 듯 그녀의 아이디를 알아낸다. 사진을 내려본다.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인스타에 비춰진 그녀의 취향과 관심사는 나와 상당히 맞아 보였다. 인스타를 열성적으로 하진 않는 사람인지 많은 것을 알아내긴 힘들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도 나는 그녀를 알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알고 싶다. 그녀의 입에서, 행동에서, 눈빛에서 나오는 사인들을 읽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팔로우하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 날은 집에 잘들어갔어요?"
이런 저런 얘기, 이런 저런 장소, 하지만 뻔하지 않은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관계의 초반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사랑은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여자친구는 나의 동태를 파악하려는 타입은 아니어서 우리의 만남은 쉬웠다. 나와 그녀가 육체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시 처음 만날 때 나의 여자친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고, ‘우리는 친구다.’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녀도 순응하며 애정 어린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만남이 다섯번째에 접어들 때까지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았다. 동일한 시간 동안 나는 여자친구를 똑같이 다섯 번 만났다. 그 중 세번은 그녀와 만나 술을 마신 후 취해 여자친구의 집에서 자는 짓이었다. 나도 내가 많이 나쁜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선택했다. 그녀를 만나고 여자친구의 집으로 가 여자친구의 해맑은 미소를 보는 것이 그 동안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더 강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그녀였다. 그렇다면 여자친구와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녀를 만나면 될 터인데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나는 그 두 여자에게서 나오는 차이에서 나오는 위화감을 즐겼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감정을 정리한다. 나는 여자친구에게로 갈 것이다.
그 누나와 나는 아직 서로 카톡을 모르는 채 인스타 메시지로 얘기를 나눴다. 굳이 눈치나 숨기는 의도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랬다. 어찌 보면 우리 관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누나에게 마지막으로 보자고 말한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같이 갔던 그 바는 아니다. 동네의 시끄러운 펍에서 나는 누나에게 이별 아닌 이별을 고한다. 누나는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말한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담배나 필래?”
그 날 이후로 추운 계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또 많이 아팠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쉬운 길도 어려운 길도 둘다 마다한 나는 그 계절 동안 많이 아팠다. 그 즈음 여자친구에게 풍기는 나의 이상한 기운은 그녀가 나를 점점 멀리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떠나가게 만들었다. 계절은 또 다시 바뀌고, 또 바뀌었다. 나는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 누나와 내가 마시던 그 바에서 나는 거의 매일을 혼자 마셨다. 어느 날, 문이 열리고 누나가 들어온다. 나는 외면하지만,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오랜만이야 민성아”
“응 누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지 누나는?”
“잘 지냈지 뭐”
“난 좀 취했어 누나”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누나랑 얘기하기 싫어”
“담배나 필래?”
“그럴까…”
나는 누나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누나를 사랑하는 건 아냐.”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난 너가 가엾을 뿐이야.”
“누난 날 사랑하지 않아?”
“그럴 기회조차 없었지”
“누나 말이 맞아.”
“춥다, 들어갈까?”
“누나”
“왜?”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라도 해줘”
“사랑해”
“나도 사랑해.”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5-08-17 01:3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