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ort_export
문화교양 9
여러 분야의 문화교양 자료와 정보를 공유합니다.
새로고침 | 로그인
익명
도서 | 등록일 : 2012-12-23 02:36:05 | 글번호 : 4798 | 0
567명이 읽었어요 모바일화면 URL 복사
다소 생소한 중국 작가의 책을 소개합니다.
비극과 신화('심종문'의 <변성>)

  얼핏 보면 <변성>은 신화나 동화처럼 보인다. 순박한 사람들의 정과 소년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변성>은 신화인 동시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는 비극을 초래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 무엇이 비극을 비극답게 만드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로 하르마티아(Harmatia), 달리 비극적 결함이라고 불리는 개념을 제시했다. ‘작은 결함’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이 개념은 보통 성격적 결함으로 이해되나, 최근에는 ‘결함’이라는 것 자체가 주인공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비극적 세계, 즉 일시적으로 무질서한 상태에 돌입한 비극적 구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변성>에서 나타나는 하르마티아는 후자의 개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양상이 자체적으로 복합적인 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취취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비극적 운명과 관계가 있다. 취취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그는 우연히 마을처녀인 취취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의무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동반자살을 택한다. 취취의 어머니는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자살을 미루었다가, 취취를 낳자마자 강물에 투신을 한다. 이로 인해 할아버지는 트라우마가 생겨서 취취가 그녀의 어머니처럼 될까 항상 걱정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비극적 요소들은 취취의 탄생부터 잠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차적으로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외부적 요소와 관계가 있다. 천보와 나송 두 형제는 우연히도 모두 취취에게 반하고 만다. 나름 우애가 깊었던 두 형제는 이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그 지방의 전통에 따라 노래로 승부를 보기로 했고, 경쟁에서 졌다고 생각한 형 천보는 고향을 떠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뱃사공 일을 하는 취취의 할아버지는 그녀의 부모들의 비극적인 사랑을 지켜보면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두 형제가 취취에게 구애하는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취취에게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노인의 걱정을 모르는 두 형제의 집안에서는 할아버지가 취취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취취는 마음속으로는 둘째인 나송을 좋아하지만, 할아버지가 자세한 일을 알려주지 않는데다가, 수줍어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갈등이 깊어가는 도중에 천보가 강에 빠져 죽자 나송은 취취에 대한 할아버지의 지나친 간섭이 형의 죽음을 불러온 것처럼 느껴져 사공 노인에 대해 쌀쌀맞게 변한다. 게다가 취취에 대한 마음조차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형 천보의 죽음이 떠올라 그는 내적 갈등을 겪다가 천보를 찾으러 훌쩍 떠나게 된다.

  보다 좁은 시각으로 접근하면, <변성>에 등장하는 비극의 시발점은 뱃사공 노인의 성격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르마티아의 기본적 정의를 따른 것이지만, <변성>의 갈등 요인은 흔히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라고 불리는, 대개 왕족 신분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서양 비극과는 차이점을 지닌다. 서양 비극의 주인공들은 ‘오셀로’와 같이 일반적으로 오만이나 지나친 자만과도 같은 태생적인 성격적 결함을 지닌데 비해, <변성>에서는 비극의 원인이 되는 뱃사공 노인의 망설임은 취취의 탄생에 관련된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과 이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우연히 두 형제 모두 취취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또한 비극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통적인 서양의 비극과 비교해보면, <변성>에서 비극을 발생시키는 요소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결함이나 특징보다는 일반적인 인물들의 운명적이고 우연적인 사건들을 둘러싼 갈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변성>의 비극은 전통 서양 비극과는 다른 전개 양상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변성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에게는 <변성>은 비극이 될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인생의 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다.” 변성에서 나오는 운명적 혹은 우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인물들의 엇갈림은 비극을 암시한다. 그러나 심종문의 소설의 끝을 단정짓지 않는다. 변성의 마지막에 나송은 형 천보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떠나가고,.취취는 그런 나송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다. 나송이 돌아오는지,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대로 끝이 난다. 오스카 와일드의 정의에 입각해서 보면, 취취의 사랑은 결코 비극이 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가진 것도, 가지지 못한 것도 아닌 그 중간 과정의 단계에 있는 그녀는 그 희망 하나를 품고 비극적 운명에 저항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변성>은 비극을 초월한, 사랑에 대한 신화로도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굳이 오스카 와일드의 정의를 따르지 않더라도, 변성은 불멸의 신화이자 동화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라는 끊임없이 변주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수 많은 작품들이 사랑과 이별을 다루었고, 이 불멸의 신화는 심종문의 손에서 향토색을 듬뿍 입고 <변성>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 했다. 재탄생의 과정에서 신화는 비극적 요소가 가미되었고, 단순한 사랑에 관한 동화가 아니라 운명적 비극성을 지닌 작품이 되었다. <변성>은 때로는 고대의 신화를 노래하는 듯한 서사시 같은 느낌을 주는가 하면은 때로는 섬세한 필체와 묘사로 동화 속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심종문의 <변성>은, 인생의 비극적 요소와 신화적 요소를 몽환적 묘사기법을 사용해서 훌륭하게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순수문학이 조금씩 자리를 잃어가는 때에도 그는 꿋꿋하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를 유려한 문체를 통해 풀어냈다. 이러한 자신의 문학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는 주체성이 없는 ‘기녀 같은 작가’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1980년대 이후 재조명을 받으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변성>은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동화로 읽힌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비극과 오스카 와일드적인 신화적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따라서 <변성>은 비극과 신화 그 중간 혹은 그 모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5-08-14 23:48:45:


댓글수 3
새로고침 | 목록보기 | 댓글쓰기

댓글 1 익명 2012-12-23 11:32:36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혹시 머리말이나 서평이 아니고 본인이 쓰신 글인가요? :


댓글 2 익명 2012-12-24 09:47:37
@노트 넵ㅎ :


댓글 3 익명 2012-12-24 17:23:57
이번에 전공 기말고사 준비하면서 줄거리만 대충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ㅋ 잘 읽었습니다. 약간 글이 어려운듯 하네요...ㅠ :


댓글을 작성하실 수 없습니다. (권한이 없는 회원레벨)
목록보기 
캠퍼스프렌즈 | 대표 : 박종찬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70길12 402-418A
사업자 등록번호 : 391-01-00107
02-925-1905
e-mail : kopapa@koreapas.com
고파스 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문의 | FA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