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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향기아마거의그랬을순간들
[문학의 향기] 아마 거의 그랬을 순간들
글쓴이 : 대학원신문 | 등록일 : 2018-06-08 13:10:08 | 글번호 : 9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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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거의 그랬을 순간들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 󰡔문학동네󰡕, 2017 겨울호.

     

어떤 결정들은 선택하지 못한 사이에 내려졌다. 그 날 그 때가 돌이킬 수 없는 기로에 선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모든 결정이 내려진 이후의 일이었다. 이제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무엇도 달리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내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럼 어떤 말을 해야 했을까. 정영수의 더 인간적인 말은 안락사를 결행하는 이모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조카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살하러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타자들의 이야기이다. 존엄한 죽음의 선택을 둘러싼 숱한 논쟁들 속에서 우리는 단단한 법과 개인의 윤리와 인간다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대한 말의 지도를 그려왔다. 누구든 의견 하나쯤은 보탤 수 있는, 때로 장대한 논리의 성채를 만들 수도 있는 그런 지도를.

그 지도 위에 선 우리는, 이제 안락사를 하러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얼굴을 보며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다 왔다, “너희는 들어와도 되고 들어오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이상, 우주의 원리 따위에 대해 언제나 새벽이 다 가도록 밤새 논쟁을 벌이곤 했던 부부, 그 치열한 논쟁이 서로에게 끌림이었던 동시에 갈등이 되어 결국 이혼 위기에 놓인 해원과 나는 이모의 마지막 얼굴을 보며 어떤 적절한 인사도 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곧장 때려치우라고 다시 한 번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그동안 고마웠다고, 잘 가시라고 인사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이모를 쳐다보기만할 뿐이다. 죽음에 대한 타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과 윤리의 획정은 그것이 철저히 나의 현실로부터 유리된 것일 때에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실재적인 것,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을 대화 주제로 삼는 일에 익숙지 않았, “오히려 관념적인 것, 우리와 먼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쪽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주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며칠이고 떠들 수 있지만 이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고,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며칠이고 논쟁할 수 있지만 이모가 자신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입조차 열지 못한다는 것을.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결정들 속에서 가만히 어떤 결정의 순간들을 기다리게 될 때도 있다. 누군가 죽음을 결정했다면 그 삶을 지켜보는 타인들의 몫은 어디까지일까. 더 인간적인 말은 안락사를 결심한 이모의 삶을 되짚는다. 그런데 그 생애란 어쩌면 대단히 많은 부분이 가지치기되어 있고, 모두가 그 결정을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삶이다. 이제 갓 환갑을 넘긴 이모는 큰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 이모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우울증 때문도 아니고 외로워서도 아니며 그저 자신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라고 서술된다. 바로 이 지점이 더 인간적인 말이 더 말하지 않는 지점이며, 그로써 질문들이 열리는 지점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건강한 몸으로 조용하고 안온한 삶을 영위하는 중년 여성이 자살을 결심했다는 소설의 설정은 정확히 그 반대되는 지점의 어떤 죽음의 당위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안락사라는 단어에 내포된 안온하고 존엄하며 단정한 죽음의 의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처절한 죽음과 삶의 병치이다. 더 인간적인 말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 차마 그려내지 못한 이야기들은 현재 소설의 서사에서 매끈하게 삭제되어 있는 또는 괄호 쳐져 있는 어떤 삶의 순간들이 아닐까.

젊었을 적 카나리아제도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며 큰 돈을 벌었던 이모는 호세라는 선장과의 내기 게임을 회상한다. 전재산인 배를 걸고 벌인 백개먼 게임의 주사위를 바꿔치기한 호세는 상대를 속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게임에 져서 배를 잃었고, 상대는 호세에게 속았지만 배를 얻었다. 의도의 성패와 무관하게 미끄러지고, 그 결과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인생의 우화는 이모의 마지막 결행과 대칭을 이룬다.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 그저 던져진 주사위의 결정에 따를 뿐. 그러나 안락사는 결국 이모의 모든 욕망과 선택을 수렴하는, 수가 하나뿐인 주사위로 던져질 것이다.

죽음의 선택에 대한 연역법과 귀납법, 어떤 증명과 논증들이 가까운 현실에 맞닥뜨려졌을 때 그저 불가해한 현상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삶의 많은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들을 그저 사후적으로 맞춰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익은 수박을 고르려면 줄무늬와 배꼽을 봐야 한다는 사실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이모의 호들갑처럼 새삼스럽게.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무의미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은 백개먼 게임만이 아니다. 수박 고르는 방법을 알게 된 기쁨의 순간 혹은 전재산을 건 주사위가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숨 막히는 순간, 아니면 안락사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어떤 결정의 순간, 그런 반짝임의 순간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삶은 아마도 그저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무의미한 이야기들로 가득 찬 무료하고 안온한 우주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우린 그저 조심스럽게 상상할 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결행의 순간, 그리고 타인과 타인의 죽음에 가닿으려 하는 상상의 순간, 그때에 필요한 것은 결국 용기일 것이다. “복순이에게 완벽한 삶을 주고 싶었던 이모가 고양이 복순이를 안락사시키던 순간을 회상하며, “어떤 고통도 없었을 거라고 믿는 것, “아마 거의 그랬을 거야라고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 순간을 말할 수 있게 된 용기처럼. 이모가 안락사를 도울 의사와 함께 건물로 들어간 뒤, 말하는 법을 잃은 사람들처럼 침묵한 채로 그저 바닥에 앉아 기다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던 그들에게 다가올 어떤 순간의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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