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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 불균형의 맥락주의
[고전읽기] 불균형의 맥락주의
글쓴이 : 대학원신문 | 등록일 : 2018-06-08 13:08:18 | 글번호 : 9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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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균형의 맥락주의

개럿 스테드먼 존스 저, 홍기빈 역, <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 아르테, 2018.

     

염동규

     

무엇보다도 이 말을 먼저 하는 편이 좋겠다. ‘맑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핍진한 이해를 갈망하는 자들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곱씹어 읽을 것을 추천한다. 풍부한 각주까지 더해 무려 1000페이지를 넘는 이 저작은 맥락에 대한 성실한 재구성과 함께 맑스 사유의 형성이라는 횡단면을 풍요롭게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스라는 렌즈를 통해 유럽의 19세기 자체를 우직하게 조명하는 학술적 진중함마저 갖추고 있다. 곧 살펴볼 것처럼, 스테드먼 존스의 저작이 지닌 문제적 측면 역시 지적되어야 하지만, 이 책은 독자의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아니 오히려 독자들의 정치적 입장을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읽어둘 필요가 있는 저작이다. (지나가는 김에 해두는 말이지만, 저작의 성과에 먹칠만 되고 만 <한국일보>의 역자 인터뷰는 잊기로 하자. 번역을 잘해놓고도 욕을 먹는 기괴한 사례 하나를 컬렉션 삼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이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이는 문제점들에 대해 좀 더 다뤄보고 싶다.

가장 눈에 밟히는 것은 저자가 맑스를 독일 관념론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단순화시킨다는 점이다. 저자는 맑스의 1844-46년의 저작들로부터 독일 관념론의 영향관계(이 시기 맑스가 인간의 주체적인 자기활동과 사회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 그 증거다)를 찾아내면서, 엥겔스로 인해 부여된 유물론자 맑스의 모습을 거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맑스의 관념론-목적론적 도식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성, 자발성, 자유에 기초한 전망을 부여받는 반면, “그 집단을 구성하는 여러 개개인들은 그러지 못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맑스의 관념론 수용은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더러 해결되지 않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맑스의 저작들을 성실히 읽어본 독자라면, 맑스 텍스트에 목적론은 물론 반목적론 역시 발견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맑스의 이 시기 텍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텍스트에서도)가 자신의 전개 과정에서 발산하는 진동과 떨림, 즉 목적론과 반목적론 사이에서 맑스가 걷는 고민의 횡보(橫步)목적론의 수용자라는 자신의 틀로 환원시켜 직선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맑스주의로부터 맑스를 분리해야 한다는 수상쩍은 전제이다. 주장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192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맑스주의를 탈구축하기 위한 지향 속에서 여러 차례 제기되어 왔던 것임에도, 저자의 버전은 유난히 수상해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도 다음의 이유로부터 기인한다. 1)저자가 맑스를 오로지 19세기의 인물이기만 한 것으로 이해하며, ‘맑스의 수용사는 완전히 배제시킨다는 점. 2) 그가 말하는 맑스주의가 별 예외 없이 엥겔스-카우츠키-플레하노프의 계보와만 연결된다는 점. 맑스주의의 제거가 아니라 맑스주의를 다시 쓰는노작들에 익숙한 독자로서는 이 두 지점이 확실히 의아하다.

몇몇 비판적 논평에 대한 저자 자신의 반론(“The current debate about the significance of Marx”)에 따르면, 이와 같은 접근법이 채택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작업을 역사학자의 작업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거듭해서 󰡔칼 맑스󰡕정치적 팜플렛이 아니라 ‘19세기의 역사에 대한 저작임을 상기시키며, 19세기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맑스를 읽을 때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들을 논평가들이 놓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나는 이에 맞서 그의 저작이 지닌 두 가지 문제점을 더불어 지적해둘 필요를 느낀다. 첫째, 그는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매우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그는 마치 엥겔스를 통해 출현한 이른바 맑스주의가 맑스주의의 역사 전체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군다. 역사학도로서의 그가 정말로 맥락을 중시한다면, 어째서 맑스의 19세기 맥락만 중요하고 맑스주의의 20세기 맥락은 안 중요한 걸까? ‘맑스주의의 역사가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맑스주의=잘못 인도된 유물론>이라는 비역사적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았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둘째,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맑스와 맑스주의를 시나브로 (정치 vs. 역사라는 그의 은연중의 구분을 고스란히 전도시켜 말하자면) ‘정치적인방식으로 읽어내는 면이 있다. 맑스의 논리적 모순을 우리가 그로부터 사유를 끊임없이 재개해야 할 사유의 공동 작업장’(발리바르)으로써가 아니라 단순한 결핍으로 읽어냄으로써 맑스를 어딘가 모자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맑스의 정치적 선택이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적절한 개입이 아니었다는 논평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Jamie Melrose가 지적한 대로 󰡔칼 맑스󰡕는 맑스주의로부터 맑스를 구해내는 게 아니라 차라리 맑스 자체에 대한 폐기를 주장하는 언론의 호평을 받게 되었던 게 아니겠는가? 자신을 역사학도로만 한정지을 수 있다고 믿는 그로서는 자기 저작의 수용 양상이 오해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대답이 충분할 리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세상에서 맑스를 논해야 한다면, 어떤 저작도 자신을 특정 분과 학문에 의도한 대로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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