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서 깊은 도시
인구 160만의 필라델피아는 한때 미국의 수도였던 대도시입니다. 그렇기에 미국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이 공포되었던 독립기념관, 초창기 국회의사당, 미국 최초의 은행 등 여러 역사적 유산들이 필라델피아에 있습니다. 유럽식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모여 있는 구시가지, 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중심부, 노숙자와 실업자들이 떠도는 폐허의 외곽 등이 모두 존재하는 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선 필라델피아를 들었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요? 아마 크림치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다름 아닌 치즈 스테이크입니다. 핫도그 빵에 치즈와 다진 소고기를 넣은 음식인 필리 치즈 스테이크는 버거킹과 써브웨이의 메뉴로 등록될 만큼 대단한 인기를 자랑합니다. 특히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하는 정통 치즈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면 필라델피아 방문은 필수입니다.
필라델피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스포츠입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4대 프로스포츠인 NFL, NBA, MLB, NHL 소속 구단을 모두 보유하고 있습니다. NFL의 필라델피아 이글스와 NBA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이전에 연재한 글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NHL의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와 함께 아직 다루지 않았던 MLB 소속 구단이 오늘의 주인공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입니다.
2. 열광과 광란 사이
필리스를 소개하기에 앞서 필라델피아 스포츠 문화에 대해 먼저 다뤄보고자 합니다. 앞서 소개한 여러 역사적 유산들이 필라델피아의 엘리트 계급 문화를 대표한다면 필라델피아의 스포츠 문화는 노동자 계급 문화를 대표합니다. 그만큼 화끈하다 못해 과격하기까지 한 응원문화가 형성된 필라델피아 팬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Philadelphia’와 ‘Hooligan’을 합친 ‘Philligan’, 일명 필리건입니다.
필리건은 연고 구단이 선전할 땐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지만 부진할 땐 거침없는 야유를 퍼붓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신공격도 불사하는 필리건의 악명은 많은 선수가 필라델피아 지역 구단에 입단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까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이글스가 NFL 선수들이 가장 소속되기 싫은 팀으로 뽑힌 것입니다. 2017년 이글스의 슈퍼볼 우승 이후 필리건이 일으킨 폭동은 그 설문 조사 결과가 어째서 나왔는지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필리스는 이러한 필리건 문화가 가장 공격적으로 표출되는 구단입니다. 필리스 팬들은 홈 경기뿐만 아니라 원정 경기까지 찾아가 야유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 대상엔 필리스도 포함되어있습니다. 트레이드 거부로 FA 제도의 시초가 된 커트 플러드, 신인 지명을 거부한 J.D.드류, FA 계약을 거절한 스캇 롤렌 등은 광적인 필리건을 그 이유로 꼽았습니다. 도대체 왜 필리건은 필리스에 더 흥분하는 것일까요?
3. 지고 또 지고
1883년 창단된 필리스는 중위권을 맴도는 팀이었습니다. 총 30팀 중 10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현재와 달리 당시엔 16팀 중 2팀만이 포스트시즌에 치렀기 때문에 필리스가 가을야구를 맛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1911년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될 에이스 투수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의 데뷔와 함께 호성적을 거두게 된 필리스는 1915년 첫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합니다.
비록 보스턴 레드삭스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필리스의 앞길은 밝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1918년 구단주가 높은 연봉을 이유로 알렉산더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하면서 필리스의 암흑기는 시작됩니다. 무려 31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17번의 꼴찌를 기록한 것입니다. 평균 승률은 겨우 0.373에 불과했으며 1932년을 제외하면 언제나 5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고 맙니다.
1950년 호성적을 거두며 두 번째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상대는 MLB 최고 명문 구단인 뉴욕 양키스였고 4연패를 당하며 또다시 준우승에 그칩니다. 이후 또다시 중위권을 맴돌던 필리스는 1964년 모처럼 90승 60패로 1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12경기 동안 10연패를 당하며 6.5게임 차를 따라 잡히는 굴욕을 맛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가 필리건의 공격성을 매섭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4. 두 전설
1964년의 충격 때문인지 필리스는 다시 패배가 익숙한 구단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부진에 대한 필리건들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치솟습니다. 실책이라도 저지르는 선수는 가차 없이 욕설과 모욕을 견뎌야 했고 이러한 부담감은 다시 실수를 저지르는 악순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972년 우울과 좌절에 빠진 구단과 필리건을 구원할 두 사나이가 등장합니다. 바로 스티브 칼튼과 마이크 슈미트였습니다.
스티브 칼튼은 강속구와 함께 역사상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슬라이더를 구사했으며 엄청난 이닝과 탈삼진을 기록하는 투수였습니다. 1972년 트레이드로 합류한 그는 346이닝 27승 10패 방어율 1.97 310탈삼진이라는 괴물 같은 성적을 거둡니다. 같은 해 데뷔한 마이크 슈미트는 역사상 최고의 3루수로 꼽힙니다. 처음엔 공갈포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이후 통산 548홈런, MVP 3회, 골드 글러브 10회 수상으로 칼튼과 함께 투타의 기둥이 됩니다.
불세출의 두 선수가 등장하며 필리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좋아진 팀 성적에도 투덜대던 필리건들도 차츰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마침내 1980년 24승을 올린 칼튼과 48홈런을 때려낸 슈미트의 활약으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게 됩니다. 슈미트와 함께 당대를 넘어 역대 최고를 논하는 3루수 조지 브렛이 이끄는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한 필리스는 4승 2패로 구단 사상 처음이자 창단 9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합니다.
5. 10000을 넘어 1로
감격스러운 첫 우승 이후 필리스는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둡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83년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1993년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패배하며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그치고 맙니다. 2007년엔 모든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10000패를 달성하며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되새김하기도 했지만, 필리스는 제2의 전성기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두 사나이가 필리스를 전성기로 이끕니다.
2005년 부임한 찰리 매뉴얼 감독과 2006년 부임한 팻 길릭 단장은 필리스를 진두지휘합니다. 선수 시절 활약했던 일본의 스타일을 접목한 전략과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인 매뉴얼 감독, 빅마켓 클럽 운영의 달인이자 1993년 필리스에 아픔을 선사한 주인공이었던 길릭 단장은 우승을 위해 달려나갑니다. 두 사람의 그늘에서 라이언 하워드, 체이스 어틀리, 콜 해멀스 등 필리스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들은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2008년 NL 동부 지구를 평정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필리스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만난 밀워키 브루어스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만난 LA 다저스를 차례로 꺾고 15년 만의 월드시리즈 도전에 나섭니다. 상대는 필리스처럼 오랫동안 약체였던 템파베이 레이스였습니다.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두 팀이었기에 서로 필사적인 승부를 펼치며 매 경기 접전이 벌어집니다. 혈전 끝에 필리스는 4승 1패로 우승하며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2009년 필리스는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했지만, 양키스에게 우승을 내주고 맙니다. 이후 로이 할러데이, 클리프 리, 로이 오스왈트 등을 영입해 강력한 선발진을 바탕으로 우승 도전에 나서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맙니다. 이후 유망주들을 육성하며 권토중래를 노리던 필리스는 2019년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성을 자랑하는 브라이스 하퍼에게 13년 총액 3억 3000만 불을 쥐여주며 다시금 대권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
P.S.
프로스포츠에서 패배란 무엇보다도 싫은 것입니다. 그런 패배를 10000번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좌절일까요? 5월 17일 기준 KBO 통산 최다 패배 기록이 롯데 자이언츠의 2476패임을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입니다. 하지만 그런 좌절들 속에서도 항상 포기하지 않고 우승을 일궈낸 필리스의 모습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은 축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5-07-24 00:5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