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독한 마티니를 마시고 입이 건조한 A는 담배를 피고 바닷 바람을 들이 마실 겸 밖으로 나온다. 그녀가 이 바닷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었다. 담배 연기의 텁텁함을 이 소금 향이 조금 지워준다. 어느덧 밤이 시작 된다. 6시부터 8시까지. 칵테일을 3천원 싸게 판매하는 해피 아워가 끝나 간다. 하지만 그녀는 들어갈 생각이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술이 더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녀는 마치 포춘 쿠키를 뜯는 것만 같다. 술잔을 비워서, 잔 밑을 내려다본다. 그 속에 답이 있길 바란다. 물론, 답이 없다는 것 쯤은 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포춘 쿠키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지 않는가. 그저 뜯는 것 뿐이다. 마시는 것 뿐이다.
8시가 다 되어갈 즈음 한 남자가 들어온다. 그는 청바지에 낙낙한 셔츠를 입고 있다. 순간 바 주인이 긴장한다. 그녀가 일할 때 가장 즐거울 때가 젊은 남자가 혼자 들어올 때이다. 티는 내지 않지만, 조금 더 술을 많이 타 남자들이 취하는 것을 보길 즐긴다. 하지만 남자들은 대개 A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때가 많아서 그녀는 살짝 질투감을 A에게 느끼고 있는 와중이다. 그 남자, B는 독한 술을 시킨다. 마티니다. 주인은 역시나 진의 비율을 늘린다. 하지만 오늘밤도 주인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저도 마티니 마셨는데.”
A는 마티니가 주문 되자마자 B에게 말한다. 주인은 또 시작이구나 생각한다. 그녀는 A에게 눈을 흘긴다. 그러면서도 조금 부럽다. 사실 이 멘트는 A가 자주 쓰는 패턴이다. 그녀의 취미다. 여행자들의 낭만을 이용해 그녀의 하룻밤 취기를 해소한다. 집에 들이고, 집에서 내보낸다. 외로움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녀는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이 행실은 이 바 바로 옆 바닷가 1층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기 일수였다. 그들은 A를 ‘서울에서 내려온 문란한 처자’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그녀는 왠지 모를 애수를 풍기고 다녔기 때문이다. 인사를 잘하지 않아도, 마을 커뮤니티에 잘 참여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들에게 ‘어딘가 사연을 품고 있는 여자’ 였다.
“폼 잡고 싶었어요.”
B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는 007이 마티니를 자주 시킨다 말한다. 그래서 자신도 맛은 모르지만 열심히 마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매력적인 말은 아니다. B는 사실 숙맥에 가까워, 자신을 어필하는 법을 잘모른다. 보통 그것을 매력으로 여기는 여자들만이 그를 좋아해줬을 뿐이다. 여행이랍시고 자주 입지 않는 청바지에 셔츠를 입었지만, 오늘 낮에 A의 집에서 나온 남자처럼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 자주 입는 비즈니스 캐주얼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여자들에게 큰 주의를 끌고 싶어하지 않아서 그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가게에서는 철지난 노래들이 나온다. 최근 유행이 된 80, 90년대 음악들이다. 그래도 주인은 음악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유행을 따르지만 그 시대의 음악들 중에서도 나름 선곡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 세계에도 한계가 있어 격일로 같은 플레이리스트가 반복된다. 지금은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세월을 한탄하는 곡이다. 지나간 사랑 마저 잊혀져 가는 세월이 야속하다고 여자 가수는 담담하게 노래를 부른다. 당연히도 A는 이 노래를 안다. B는 모르지만 주인의 의도대로 취기가 올라오며 말한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부적절한 말이다. 처음 본 여자에게는 더더욱. 주인의 질투감은 가셨고 이들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A도 뻔한 말로 답한다.
“맞춰 보세요.”
“스물 아홉?”
A는 웃는다. A는 올해로 서른하나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난 지 스물 아홉 해가 지났을 때, 그녀는 낙태를 했었다.
4
연락처도 몰랐다.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그녀가 찾아본 것은 웃기게도 페이스북이다. 그는 그녀에게 핸드폰 번호와 이름을 알려줬지만 결번이었다. 회사의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XX 상사. 저장된 이름과 회사 이름을 조합해 구글에 검색을 해보지만 허탕이다.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녀는 좌절한다. 성수기, 바닷가에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부모들이 아이들과 뛰어놀 때 그녀는 가까운 대도시 병원에서 애를 지우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참았던 눈물이 방으로 들어와 비로소 터진다. 부모님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다. 친한 친구들은 그녀가 내려온 후 대부분 멀어진 후였다. 그녀는 안정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아니, 사실 지워진 것만 같다. 하지만 흉터는 아직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다.
처음에 이 곳을 왔을 때 그녀는 1년을 잡았다. 그 정도 살다가, 서울로 올라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그녀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그 후 벌써 3년째다. 그녀는 네댓 번의 성수기를 거친다. 해는 빠르게 바뀌지만 그녀는 그대로다. 그저 더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리고, 그녀는 여행자들의 낭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도 이 마을 또한 도락이었기에.
그래서 밤은 그녀의 독무대였다. 그녀가 인스타의 지역 명물로 소개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와 잤다. 한번은 그녀에게 호감을 표현한 여성과도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 그녀는 딱히 바이섹슈얼이 아니었지만 그 여성에게도 낭만이란 것이 있기에 사냥감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낭만을 사로잡아도 아무런 명예가 없다. 심지어 그 사람의 마음에 생채기를 줄 수도 없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던 남자처럼 할 수가 없다. 낭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어차피 여행객들은, 그 마을에 낭만을 두고 올 작정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없는 장사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B가 A의 사냥감이다. B의 낭만을 사로잡아 그녀는 그 낭만을 내일의 빨랫대에 걸어놓을 작정이다.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다. 애수에 젖은 그녀의 눈이 하나의 방법이라면 방법일 것이다. 그녀와 그는 꽤나 긴 대화를 나눈다. B는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해 어쩔 줄 모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고 돌아올 때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아침 일찍 눈을 뜬다. 여느 때처럼, 장을 보러 갈 작정이다. 거실 겸 부엌으로 나가자 B가 보인다. 그는 말한다.
“좋은 아침이에요!”
A는 꽤나 놀란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B가 계란 후라이를 하는 것을 보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동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도 결국 오늘 점심이면 KTX를 타고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갑자기 A의 머리에 잔인한 생각이 스친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오늘 제대로 된, 살이 통통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만난 것이다.
“저는 내일 서울에 올라갈 생각이에요.”
“오늘도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B는 쾌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한다. 어젯밤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적극적이게 그녀를 자극했지만 계속 그녀를 배려했었다. 하지만 A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쾌활한 말투와, 하룻밤의 관계 연장을 원하는 그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할 정도였다. A는 어제와 다른 태도로 무뚝뚝하게 식빵 두개 사이에 계란 후라이를 넣어 먹는다. B는 눈치를 보며 어물쩌물하다가,
“아, 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명함을 내민다.
‘XX 상사’
‘B 사원’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5-08-12 19:2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