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 대학원생의 자존감 지키기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이병주

대학원 합격 발표가 있던 날, 나는 가족들과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발표시간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고, 마침 신호대기 중이라 합격자조회를 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핸드폰에 떠있는 축하문구를 읽고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뛰는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운전대를 아버지께 맡기고 창 밖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감사인사를 하며, 행복을 만끽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공존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시작했던 내 대학원 생활의 첫 학기를 마치고 이상과 다른 현실을 직면했다. 하나는 돈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원은 지식을 배우는 공간이 아닌 내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등록금이나 생활비에 관련한 돈 문제는 다행히도 학원강사를 하며 저축해두었던 돈으로 어느 정도 충족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나의 무지를 깨닫고 끝없이 추락하는 자존감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면 많은 양의 지식을 얻고 그 지식으로 커다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직면한 현실에서는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정도와 몇 줄의 문장을 적을 수 있을 뿐이었다. 무지에서 오는 자존감 추락은 공부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자존감은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더 큰 비상을 위해 혹은 꿈을 위해 약간의 준비기간을 거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준비기간은 실패자의 변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시선들에 얽매여 있던 것이 나의 자존감을 앗아갔던 것 같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생산성이 없다는 것은 엄청난 약점으로 여겨진다. 이 생산성에는 자본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과를 창출하여 경쟁자보다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해주는 무언가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것 또한 포함된다. 특히나 국문과 대학원생들은 다른 전공의 대학원생들보다 가질 수 있는 전공의 이점이 현저하게 적다. 전공을 살려 아르바이트로 번역을 하거나 외국인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범박하게 효용을 따지자면 가치가 현저하게 낮은 전공이 국문학이다. 학문에 효용을 따지 것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효용과 상관없이 국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내 꿈이었고, 앞으로도 꿈일 것이다. 이 꿈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속할 힘이 필요하다. 나는 대학원 생활에서 공부를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공부를 하게 해주는 원동력을 잃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생산성을 포기하면서 까지 선택한 이 길을 계속 가기 위해서,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서 자존감은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존감의 상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존감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말 한 마디 혹은 작은 행동 하나에 잘려나가는 것 같다. 첫 학기에 수강했던 수업의 마지막 날에 발표한 내 글을 보며 지었던 강사님의 표정과 빨간 볼펜으로 그어진 수많은 X자 표시 그리고 물음표, 나보다 월등히 많은 지식이나 재능을 가진 같은 전공 선·후배, 대학원생이라면 ‘책만 보면 되고 좋겠다’라고 말하며 ‘나도 대학원생이나 할까’라고 아무 말이나 막하는 직장인 친구들, 대학원만 졸업하면 취업길이 훤하다고 생각하는 친척들, ‘교수는 언제 되냐’고 물어보시는 부모님 등 내 자존감을 앗아 가는 사람들은 모두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굳이 남들의 이야기에 나의 자존감이 상실될 필요가 있을까? 자존감에 쓰이는 한자가 自存이든 自尊이든 결국 자존감은 自에게 달린 문제이다. 꿈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대학원에 왔던 용기를 기억해 보자. 나의 경우에는 합격했을 때의 설렘, 그 순간 나는 어느 누구 부럽지 않았고 그때의 기억은 남들의 시선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시 환기시켜주었다. 내 자존감은 내가 지켜야 한다. 내가 선택한 길을 굳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의 자존감을 훼손시킬 필요는 없다.
교육프로그램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신을 혹사시키고 채찍질하며 달려왔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보냈던 고등학교 시간,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학점을 받기 위해 밤을 지새웠던 시간, 방학이나 휴학 기간에는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적기 위해 스펙을 쌓았던 시간, 그때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미래는 밝을 거야’라고 더욱 더 열심히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하지만 더 이상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짓은 하지말자. 흔히 남들은 우리를 삼포세대 혹은 오포세대라고 부른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무언가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자존감은 적어도 나의 의지에 따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내 자존감을 뭉개는 남들의 시선을 포기하고, 이제는 ‘지금 내가 꿈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현재의 행복을 지향하자.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만족하고 자신을 위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있지만 자신에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남들과 비교하며, 남들이 하는 모든 말을 가슴에 담고 자존감을 깎고 있다.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한다고 구박할 사람은 없으니 자신에게 채찍이 아닌 당근을 더 많이 주는 것은 어떨까.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7 11:4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