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로 보는 우리사회(4)

게이트 플라워즈, ‘예비역’ (2010)

이경준(대중음악평론가)



섣부른 기대도 서투른 예상도
닥쳐온 지금도 다가올 미래도
애초에 그 어떤 아무런 흔적도 없었던 것처럼
이제는 누구도 아무도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
진실은 입바른 핑계로 버린 그대로
사실은 모두가 바라는 결말 그대로
이제 감은 눈이 떠지지 않으면
정의는 마른 입을 다물어
난 돌아가지 않아
뒤돌아 보지 않아
타는 심장도 따가운 시선도
흐르는 눈물도
이제 아무 소용 없어



1

‘예비역’의 노랫말엔 진실과, 사실, 정의라는 단어가 나온다. 애석하게도 모두 좋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는 않다. 사전 상으로 풀이하자면 세 단어의 뜻은 이렇다. 진실: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사실: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정의: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하지만 진실은 ‘당의정 입힌 허위’일 뿐이고, 사실은 ‘기득권에 의해 프로그램된 스크립트’로 전락했으며, 따라서 정의는 그 앞에서 ‘건조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형상’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앞에 비치는 어떤 사회와 몹시 닮았다. 어쩌면 예언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스칠 정도로.

게이트 플라워즈의 팬에겐 비밀이 아니듯 이 노래의 화자이자 청자는 1차적으로 작사가 자신이지만,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음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무거운 짐을 떠맡았다. 학교에서 배웠던 진리가 철저하게 무화된 시대, 노력과 순종만으로는 뚫고 나갈 수 없는 정글의 시대, 명함 하나 얻기 위해 무참히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지만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게 될 무한경쟁의 시대, 분노를 내뱉고 싶지만 ‘이제 아무 소용없다’고 탄식해야 하는 절망의 시대에. 세상은 파랗게 날이 섰고, 그 위에 선 사람들은 위태롭기만 하다. 저쪽에서 ‘사회는 공정해야 한다’며 ‘공정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공정’이라는 단어만큼 허구적인, 실체 모호한 단어가 있을까. 결코 사회는 공정해지지 않음을, 그럴 수 없음을 화자는 잘 알고 있다. 이번엔 마음의 상처를 비집고 ‘힐링’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침입한다. 그는 그것조차 위선의 다른 이름이라고 느낀다. 조그마한 기대를 안고 달려왔지만, 바닥 모를 무기력함만이 남고, 마지막에 떨어지는 ‘눈물’은 그 어떤 부연보다 더 구슬프게 다가온다. 피로사회, 규율사회, 위험사회, 계급사회, 거짓 위안의 사회 등 현재 한국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프레임은 많다. ‘예비역’의 가사를 간만에 곱씹으며 이런 키워드들이 절묘하게 대입된다는 점에 놀랐고, 설사 보컬 박근홍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곡은 ‘운명적인 노래’의 특성상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내용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한때 큰 반향을 몰고왔던 인디 싱글 중 하나인 10cm의 ‘아메리카노’와 이 곡이 같은 해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은 사뭇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쪽에서는 상수동과 홍대의 거리가 커피 한 잔과 함께 우아하게 소비되고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심연처럼 깊은 좌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둘은 다음해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각각 상을 받기도 했으니, 재미있는 인연이다).

그저 조금 목소리를 키워 저주를 퍼붓는 것, 그런 악다구니 밖에 남은 게 없는 자들에게 헌정하는 송가. 아니면 비루해질 대로 비루해진 자아에게 돌려주는 무덤덤한 독백. 노래는 어느 쪽으로도 읽힐 수 있다. ‘예비역’의 자리는 사회에서 승인한 여정대로 움직여갔어도 끝내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그래서 남들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는 모두에게 바치는 곡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여정은 이렇다. 학교를 졸업하고, 더 나은 학교를 가기 위한 반수생이 된다. 좋은 학교에 가고도 취업의 문턱은 낮아지지 않으며 훌륭한 취업예비군이 된다. 취업을 한 이후에도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으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그나마 제일 나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게 “잊혀지는 존재로 살다가 시간은 흘러가고, 타인이 되어 소식마저 알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됨을 오래 전 어떤 가수는 예견한 바 있다. 결국 무기력만이 해답인가. 노래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시대의 생존자라면 그 누구라도 답을 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 어떤 지면에서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지만, 예술은 오히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그 무기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거한다고 믿는다.


3

게이트 플라워즈는 이 곡으로 이름값을 크게 올렸다. 이 점에 대해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연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형편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절약하고 절약해야 연명이 가능하다. (그 점에선 대중음악평론가도 인디 뮤지션도 선뜻 술값을 계산하기 힘들다. 어찌됐건 둘 다 직업소개를 할 때, 상대방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진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교집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퇴직금 따윈 없고, 미래는 여전히 아득하다. 그 점에선 이들 역시 그 끝을 알 수 없는 ‘예비역’의 천형을 부여받은 셈이다.

‘예비역’이 빼어난 이유는 마냥 아름답기만 한 총천연색 희망을 그려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쓰디쓴 패배의 비참을 들이키지도 않는다. 그저 당신일 법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데, 그의 말을 가감 없이 풀어놓는다는 데 노래의 의의가 있다. 어쨌든 노래는 ‘돌아가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잖은가. 끝끝내 타협하지 않는다. 그건 이 시대 예비역들의 마지막 자존심일까, 인간의 최후 존엄일까.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15:2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