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오늘도 덥겠구나.”

: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품고 있는 우주적 시간을 되새기며

이후경(영화평론가)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불면증에 대해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에는 가만 두면 하루 12시간은 거뜬히 잤고, 최근까지도 허리가 지끈지끈 아파야 겨우 몸을 일으킬 정도로 숙면을 즐겼다. 어쩌다 불면증을 호소하는 선배들 앞에서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듯 나의 잠 능력을 자랑하다 ‘아직 젊어서 그래’라는 핀잔을 들은 적도 많았다. 그런 나에게도 불면증이 찾아왔다. 불면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데, 나의 경우는 잠이 잘 들지 않는 입면 장애를 가장 격하게 겪고 있다. 분명히 졸려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음에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3~4시간이 훌쩍 지난 뒤 심지어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져 있는 날이 제법 많다. 처음 몇 달은 미칠 것 같다가, 다행히 구원의 빛을 발견했다.

요즘 나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달래주고 있는 최고의 벗은 다름 아닌 미국 시트콤이다. 20분 남짓한 길이의 시트콤을 몇 편 보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져서 스르륵 잠에 든다. 반복되는 유머 코드와 오래된 연극 무대 같은 세트들, 그 세트를 실제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는 배우들, 시즌을 거듭할수록 더욱 친밀감이 느껴지는 캐릭터 등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늘 하루 분량의 불안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중 핵심은 대사와 신의 리듬이다. 비슷한 패턴의 대사와 신이 반복되면서 만들어내는 리듬은 낮 동안 평정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일상인들에게 바로 그 평정심을 되찾아준다.

같은 맥락에서 시트콤의 또 다른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일상으로의 회복력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캐릭터들은 어떤 심각하고 우스꽝스러운 사고에 부딪히기 마련이지만 결국에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에피소드에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대에서 잠을 깨고, 출근을 하고, 친구들과 밥을 먹고, 연인과 통화를 한다. 작은 사건 사고는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큰 격변이 일어나지는 않는 그런 시트콤의 세계에서 사소하나마 위안을 구할 때가 적지 않다.

엄청난 비약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영화 중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이 같은 계열의 정서적 효과를 전달한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네요.” “아무래도 그런가요.” 이런 반복적 대사의 운율과 류 치수 할아버지의 늘 비슷한 표정, 종종 화면 한구석에 놓여 있는 술병들, 언제나 날씨에 관한 말로 인사를 건네는 인물들. 그런 것들이 이별이나 죽음 같은 인생의 비극적 사건들에 직면한 인물들을 다시 ‘오늘’로 되돌려 놓는다. <동경 이야기>에서 류 치수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날 새벽, “아아, 오늘도 덥겠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지닌 울림은 말로 옮기기가 힘들 정도다. 그리고 그러한 오즈‘적’ 장면이 주는 무한한 감동의 정체에 관해 가장 섬세하고 정확하고 풍성하게 설명한 이는 물론 <감독 오즈 야스지로>를 쓴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 선생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질 들뢰즈가 한 말을 끌어들이고 싶다. <시간-이미지>에서 그는 오즈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들이야말로 계역들의 규칙성, 우주의 지속적인 연속성에 혼돈을 야기하는 것이다. 삶을 위한 하나의 시간, 죽음을 위한 하나의 시간, 어머니를 위하 하나의 시간, 딸을 위한 하나의 시간이 존재한다. 인간들은 이 시간들을 섞고 이것들이 무질서 속에서 출현하게 하며, 이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한다. 이것이 바로 오즈의 생각이다 삶이란 단순하다. 인간은 ‘잠자는 물과 같은 삶’을 흔들어 복잡하게 한다.”

언젠가 마음 아픈 일이 있었을 때 가까운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공룡 시대에 인간은 정말로 하찮은 미물이었을 것 아니냐. 우주적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온갖 악한 짓도 행성의 충돌이 지닌 파괴력보다 한참 사소한 것이다.” 물론 이는 ‘그러니 인간이 악행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적인 재난을 막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의식과 의무를 방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아픔을 꾹꾹 눌러가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데엔 우주적 관점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인간적 시간을 파악하는 겸허한 태도야말로 우리 미물들로 하여금 갖가지 이기심과 착각과 망언과 야욕과 정신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0:3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