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타자들』

민승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현실은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항상 (우리가 알거나 믿고 있는) 현실을 넘어서거나 거기에 못미친다. 자기 자신과도 다른 현실. 앎이나 믿음을 중지시키는 유령이 현실에 덧붙여져, 그것의 결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유령은 현실의 문을 걸어 잠그는 잉여인 동시에 현실이 설명할 수 없는 나머지로 남아 문이 닫힐 수 없도록 한다. 잉여와 결핍이 같아지고 닫힘과 열림이 동시에 발생한다. 현전하거나 부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전-부재,’ 삶과 죽음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산-죽음.’ 레비나스의 말대로 유령은 “철학의 뒤꿈치에 들러붙어 철학이 쫓아내거나 떼어버릴 수 없는 그림자로 되돌아오는 회의주의(skepticism)와도 같다.” 철학 속에서 철학을 눈멀게 하는 “회의주의라는 유령이 움직이는 이미지로 출몰할 때 영화가 발생한다.” 카블(Stanley Cavell)의 말대로 스크린은 현실이 창조되는 영사막인 동시에 현실에의 접근을 저지하는 차단막이기도 하다. 영화가 제공하는 현실은, 나타나는 동시에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물러난다. 질식할 것 같은 가까움으로 말미암아 철학을 철학과도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회의주의는 이제 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유령적 현실이 되어 영화로 출몰한다.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아닌 구조적 (불)가능성으로 출몰할 때 회의주의와 영화는 윤리적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옴으로써(revenant) 유령은 반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유령으로의 귀환. 이제 사유는 자신 속에서 자신이 보지 못하는 유령들이 출몰하는 자기-분열의 장소가 된다. 사유가 사유불가능한 유령과 같아질 때, 반성이 분열로 돌아올 때, 반성적 사유는 (사진)이미지를 입는다. 대상으로 길들여지기 전에 우리를 찌르는 타자의 시선, 풍크툼이라 불리는 이미지. 카다바(Eduardo Cadava)의 말대로 죽은 자의 사진은, ‘산-죽음’으로 돌아온 이미지로서 “사건을 보는 자의 도래하는 죽음을, 다시 말해 관찰자 역시 이미 항상 그렇게 존재해 왔던 이미지로 존재하게 될 것을 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이미지인 동시에 아직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지가 우리를 보고 있다.” 데리다의 말대로 이미지 속에서 보는 자는 보여지는 대상으로 전도되지만 이미지 역시 (타자의) 흔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미 항상 자신의 상실을 지시하고 있는 흔적. 그러므로 이미지 속에서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는 이미 겹쳐 있다. 내 안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보여진다. 『타자들』(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그레이스는 자신이 유령인지 모르는 유령, 유령으로 출몰하는 침입자가 집주인인 바로 자신이라는([g]host)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유령이다. 스스로를 보지 못하던 유령인 그레이스가 침대 밑에서 죽은 하인들의 사진을 보게 되고 유령이 되어 돌아온 그들 앞에서 자신의 외상적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보는 자는 이미 보여지는 자이며,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밀스 부인의 말은 우리가 이미 유령 타자와 존재를 공유하고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데이비스(Colin Davis)의 말대로 『타자들』은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시적으로 체류하다가 목적이 성취되면 영원히 떠나가는 유령과는 다른 (유령)타자들을 이야기한다. 아직 남편을 애도하지도 못한 그레이스는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아이들을 살해했다는 외상적 진실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레이스가 다시 돌아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진실을 받아들인 후에도 그녀는 “누구도 우리를 이 집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앤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그레이스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노파가 출몰하는 혼돈의 집. 내가 그 안에서 보여질 뿐 그것을 보지 못하는 유령적 현실은 결코 지울 수 없는 형태로 도처에서 출몰하고 있다. 그러나 유령이 현실을 가능하게 해준다면, 보는 자가 이미 보여지는 자라면 바로 우리가 유령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데리다가 말한다. “내가 바로 유령일세.”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6:5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