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상상력과 사회 안에서의 혁신


이상욱 (한양대, 과학기술철학)



  우리는 지난 호에서 토마스 헉슬리가 분과학문적 과학자가 아닌 ‘과학 지식인’을 강조했음을 보았다. 21세기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이런 ‘과학 지식인’은 어떤 모습일까?

  과학연구 과정에서 상상력은 예술창작 과정에서만큼이나 필수적이다. 과학연구를 통해 완성된 결과물을 잘 정리해 놓은 과학 ‘지식’과 달리, 과학 ‘연구’는 이제까지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를 풀거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연구자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부터 출발하여,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를 찾고, 왜 자신이 찾은 답이 정말로 답인지를 동료 연구자들에게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과학적 상상력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이미 살펴보았듯이 현대 과학연구가 이루어지는 맥락은 과학연구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독특하다. 과학연구에 투여되는 사회적 자원이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아졌고 그에 따라 과학연구의 결과물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역사상 유례없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학적 상상력을 사회문화적으로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과학적 답을 결정하는 과정에 사회문화적 고려를 포함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그런다면 과학지식의 객관성은 훼손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에 근거한 사회적 결정은 비효율적이거나 위험해질 것이다. 아무도 특정 정치적 믿음에 기초한 물리학으로 지어진 건물에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적 상상력의 확장은 연구주제의 선택이나 연구방법의 선택 그리고 연구 결과물이 사회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에 대한 고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학자들은 동료 과학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주제에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자들에 대한 보상 체계 역시 영향력이 큰 학술지에 출판된 논문을 중시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연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는 수없이 많고 그 중에는 현대 과학연구의 특성상 연구되지 못하는 주제도 많다.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신경성 질환을 앓는 아이의 부모가 이 질병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설득하는 내용이 나온다. 과학자들이 이 질환에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는 이 질환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분과학문의 연구 결과들을 통합적으로 결합하는 어려운 연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전문화된 현대 과학연구 상황에서 보다 ‘안전한’ 주제 말고 이 질환을 연구하는 것은 자신의 직업적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과학자들은 기존 연구 관행을 어떻게 바꾸어야 과학적으로도 가치있고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로렌조 오일’의 개발과 같은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확장된’ 과학적 상상력의 좋은 예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유전자 특허가 진정으로 과학연구의 혁신을 돕는지(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따져보면서 ‘확장된 상상력’을 활용하여 과학연구에서 정보 공유원칙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켜나갈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을 과학자 홀로 다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당연히 지나친 요구가 될 것이다. 일단 과학자가 이런 방식의 상상력의 확장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면 다른 전문가와 협력하여 자신의 과학연구를 좀 더 가치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현재 유럽에서 진행 중인 ‘정주형 실험실(living lab)’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정주형 실험실이란 과학자가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특정 사회공동체 안에 일정기간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주민들과 함께 노력하는 사업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는 자신의 실험실 연구 결과가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기 위해 얼마나 복잡한 사회공학적 기법들과 결합될 필요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며, 주민들에게 절실한 문제를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지식’의 혁신을 넘어서 좀 더 파급효과가 큰 ‘사회 곳에서의’ 혁신을 이룩하는 것이다. 모든 과학자가 이런 일에 참여할 필요는 없겠지만 보다 많은 과학자들이 확장된 상상력을 갖추고 연구실에서의 혁신을 넘어 사회 속에서의 혁신을 추구할 때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좀 더 건강하게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7 23:3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