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어찌어찌하다보니 벌써 종강을 준비해야 할 시간들이 다가온다. 그간 확인하지 못했던 학생들의 과제물과 출석부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더불어 새삼 이번 학기를 어떻게 보냈던가 생각하게 된다. 늘 그랬듯 삼월에는 긴장과 설렘으로, 학생들의 수준과 편차를 확인하는 것으로 정신없이 지냈고, 사월에는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히고, 강의를 준비하고, 졸거나 산만한 학생들에게 상처를 받다가도 간혹 눈을 빛내는 몇몇에게 위로와 힘을 얻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작년과 같고 재작년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 이쯤 되면 무사히 한 학기를 무사히 보냈으니 안위할 만한데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우울 증상과 조급함 때문이다.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이 감정들은 오월 중순 무렵부터 가슴과 머리와 팔목 부근 어딘가를 게릴라처럼 돌아다니며 나를 괴롭힌다.

증상의 원인은 의외로 간단하다. 반도 실행하지 못한 학기 초의 계획과 다음 학기의 강의 문제가 그것이다. 바쁜 방학을 보내고 삼월 학기를 준비하면서 대부분의 시간 강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도 나름 소박한 계획을 세웠었다. 학생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강의 준비를 충실히 할 것과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반드시 이번 학기에 논문 한편을 쓰겠다는. 그러나 오월 말을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없다. 내가 맡고 있는 글쓰기 과목은 한 학기에 두 번 이상 학생들의 글을 첨삭해주도록 하고 있지만 채 한 번을 해주기도 전에 나는 지치고 말았다. 두 학교에서 12학점을 강의하며 대략 200명 정도의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200명의 글을 첨삭하는 일은 상상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 주에 보통 30명의 글을 보는데 한 편을 첨삭하는데 15-20분 정도만 잡더라도 한 주에만 5-6시간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 이런 일이 한 학기 내내 매주 되풀이되다 보면 나중에는 글에 대한 감각마저 잃기 십상이다. 그 와중에도 논문을 써야한다는 압박은 끊이질 않지만 결국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다보면 학기 초에 떠올랐던 논문 아이디어는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 놓치지 않기 위해 틈틈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집중하지 못하니 생각은 분절될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오월을 보내다보면 퍼뜩 정신이 들면서 우울해지면서 또 습관처럼 다음 학기의 강의에 대한 걱정이 이어진다. 별 일이 없다면 강의가 없어지는 일이 없을 거라고 자위하지만 요즘의 대학가처럼 별 일 많고 어수선한 데가 또 어디 있으랴. 대학마다 강사를 줄이기 위한 각종 꼼수들이 자행되고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띄게 사라지는 요즘 추세라면 당장 다음 학기부터 강의할 곳이 없을 수도 있다. 강의를 주지 않는 이유를 학교는 강의 평점이나 논문 등으로 얼마든지 댈 수 있을 것이고 그마저 귀찮다면 대지 않아도 강사를 자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유월과 동시에 계약은 해지 되므로.

하여 나는 오늘도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다. 비정규직 자리라도 잡아 강의를 계속하려면 논문을 써야하는데, 강의 때문에 논문을 쓰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지 말고 한 곳에만 매진하라고 누가 쓴 소리를 한다면 구차한 변명을 댈 수도 있다. 강의를 그만 두면 다시는 불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논문을 쓰기 위해 책도 사고, 학회 회비도 내고 심사료도 내고 게재비도 내려면 강사료라도 벌어야 한다고.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0: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