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영화 속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는 이유
‘기적’이란 말을 통해서라도 살아있는 얼굴을 상상하고 싶은 마음

이후경(영화평론가)



지난 2월 10일 경, 오키나와에 출장을 다녀왔다. 절반 동안은 공식 일정에 따라 주변 섬들의 휴양지를 돌았으나, 나머지 절반 동안은 본섬에서 오키나와가 어떤 역사를 통과해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루는 공항이 있는 중심 도시인 나하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이토만 지역을 돌았다. 그곳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만든 ‘평화기념공원’과 그중에서도 오키나와 육군병원에 배속되었던 여학도병 240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따로 만든 ‘히메유리의 탑’이 있다. 두 곳을 모두 들렀는데, 히메유리의 탑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추모의 의미가 담긴 꽃을 파는 일본 아주머니들이 있다. 많은 일본 관광객이 그 꽃을 사서 위령비 앞에 올려놓고 묵념을 한다. 하지만 이곳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외지인 입장에서는 어쩐지 내키지 않는 일 같아 일본 관광객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념관 안에는 여학도병들의 학창 시절부터 1945년 6월18일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해산명령을 받고 무참하게 희생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알려주는 자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손거울 같은 어여쁜 소지품도 있었고, 그들이 단체로 본 마지막 영화였다는 존 포드 <역마차>의 포스터도 있었다. 본섬으로 피난을 떠난 가족에게 자신은 친구들을 두고 갈 수 없어 오키나와에 남기로 결정했음을 전하는 한 소녀의 편지도 있었다.

그러나 무지한 관광객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얼굴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해맑게 웃고 있는 여중고생들의 단체 사진부터 240명의 얼굴 사진을 모두 모아놓은 코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얼굴이 가벼운 관광객의 발걸음을 엄중히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표현에 따르면 “살아남을 가능성을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상상할 힘마저 빼앗기고 참혹하게 죽은” 이들의 얼굴이다. 혹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 식으로 말하면 “제물로 바쳐진 오키나와”의 얼굴이다.

프랑스의 영화학자인 자크 오몽은 얼굴 이미지에 대한 연구서라고도 할 수 있는 저서 <영화 속의 얼굴>에서 최초의 인간은 “동족의 시체들을 묻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얼굴은 살아있는 인간이 예고된 죽음을 통해 자신이 인간임을 지각하게 되는 장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얼굴의 상실은 잃어버린 죽음이며, 죽음의 박탈이다.” 이는 그가 자본주의 시대에 “광고에 의해, 예술에 의해, 철학에 의해, 다큐멘터리에 의해 … 폐물로 처리되었고, 의심받았고, 비난받았고, 고갈된” 얼굴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과 정치가 야기한 얼굴의 상실, 죽음의 박탈이 실재적 표현임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현재 미디어가 얼굴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희생자의 얼굴보다 쉽게 응시할 수 있는 다른 얼굴을 찾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최루성 상업영화처럼 얼굴을 재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도착하는 얼굴이란, 우리의 절망과 분노와 무력감을 전가하도록 지시된 피조사자들의 얼굴과 비극조의 음악이 덧붙여진 가운데 ‘뉴스’로 판매되고 있는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얼굴뿐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그토록 보기를 희망하는 얼굴들 중 대부분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점점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 ‘제발 1명만이라도’라는 끔찍한 희망의 말로 대변되는 그 아픈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영화, 드라마, 예능, 광고, 연예 기사 속에 등장하는 다른 얼굴들은 전부 치워버리게 만든다. 우리 자신의 얼굴에서도 웃는 표정을 지워버리게 만든다. 그러니 얼굴의 상실은 그저 수사학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생생하게 진행되고 있는 문제이다.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있는 말이지만, ‘살아남을 가능성을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상상할 힘마저 빼앗기고 참혹하게 죽은’ 이들이라고 표현한 오에 겐자부로의 말이 계속 마음을 찌른다. 살아남을 가능성을 상상할 힘마저 빼앗긴 자들의 살아있는 얼굴을 ‘기적’의 이름을 통해서라도 계속 상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서 미안하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9:4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