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사회의 논쟁들(3)

IMF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개혁과제논쟁
외국자본과 주주자본주의가 문제인가, 재벌이 문제인가

최은주 한국외대 국제통상학부 강사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도입이 한국 경제문제의 핵심. 재벌과의 대타협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이 필요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재벌 체제가 한국 경제문제의 핵심. 법치를 확립하고 재벌을 개혁하는 경제 민주화를 실현해야




지난 2007년 전후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경제의 개혁과제와 방향을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재벌체제의 문제와 경제 민주화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이 책과 학술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과 레디앙을 통해 제시되면서 현재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경제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독점적인 재벌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한층 더 풍부해 졌다.


논쟁의 전사(前史) - 대안연대의 출현

최근 진행되었던 한국 경제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연구자들로 구성되었던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연대회의(이하 대안연대)’에서 진행되었던 논쟁이 그것이다. 97년 위기 이후 IMF관리 하에서 진행되었던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을 ‘한국적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넘어서 대안적인 기업 소유권 형태와 지배구조를 한국 경제의 개혁 방향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그 대안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했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로 대표되는 사회-재벌 대타협론과 강력한 재벌 개혁-재벌해체를 포함한-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김상조·이병천 등의 학자들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2005년 7월, 장하준·정승일·이종태는 대담집 <괘도난마 한국 경제>를 통해 강력한 산업정책에 기반을 둔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꾀했던 박정희 정권의 성장 전략을 재평가하면서 경제 발전에서 재벌의 역할에 대한 비판 일변도에서 벗어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한국 경제의 주주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하는 대신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재벌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2007년 11월,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에서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김상조·유종일·홍종학 등은 <한국 경제 새판짜기>를 통해 박정희 정부 시기의 국가주도형 발전 전략, 특히 재벌 중심의 발전 전략은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더 나아가 현재의 재벌 체제는 현재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에 재벌 개혁 없는 한국 경제 민주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논의의 쟁점: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그리고 재벌 개혁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에 따른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문제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실업, 양극화, 재벌의 전횡, 미비한 복지제도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 구성원 다수의 빈곤과 배제, 불평등과 양극화, 고용과 삶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실현은 논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목표였지만, 이를 실현하는 과정, 특히 그 과정에서 재벌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었다.

2012년 장하준·정승일·이종태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금융 주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다. 주주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지는 해외자본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및 노동시장 정책을 실시하고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점 재벌들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한편 투자와 고용, 조세에 대한 재벌의 부담을 강화하는 ‘사회-재벌 대타협론’을 통해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재벌 개혁의 경우, 제도와 인물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주주자본주의에 적극 호응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재벌 가족들과 대기업집단이라는 경제제도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흔히 지적되는 재벌의 폐해는 대기업 집단이라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재벌 가족 혹은 가신그룹들의 이해관계와 각종 불법행위들에서 촉발되는 문제로,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방안은 그에 맞는 수사와 처벌이지, 재벌해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기업집단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면 국내 기업들에 대한 주주자본주의의 영향력을 증폭시켜 결국 개혁의 이익은 노동자나 중소기업이 아니라 해외 금융자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한 과제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경제민주화 실현을 통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한국경제가 지향해야 하는 바이며, 재벌개혁은 복지국가 실현의 선행과제가 아니라 복지국가 실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복지국가 원리에 따르는 재벌개혁’을 통해 재벌이 경제 구조 전환과정에서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강제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정희식 자본통제에 대한 재평가를 강조한다. 물론 박정희 제체의 ‘반노동-친성장주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재평가 속에서 ‘친노동, 친성장적인 국가개입주의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한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중심에 놓고 노동자 보호와 협동조합 육성, 금융 규제, 산업 정책 등의 수단을 통해 경제가 다방면에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경제체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체제의 금융시장 규제와 산업 정책 등과 같은 긍정적 요소들을 여전히 유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이병천 등 일군의 학자들의 경우, 궁극적인 이념적 지향은 상이하지만 대체로 자유주의적 법치주의 확립과 재벌해체를 통해서만이 한국 사회의 경제민주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공정한 시장 규칙과 법치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강조한다. 이들은 한국 재벌 체제 역사적 맥락과 그 낙후성 강조하고, 강력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한국 경제 구조를 변화시키고 경제 민주화를 실현하는 초석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병천의 경우, 한국 경제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을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정부의 개발 독재 하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는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반면에 재벌기업들은 강력한 사회경제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는 1980년대에 열린 민주화 과정에서도 회복되지 못한 채, 세계화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가 후퇴와 경제적 자유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이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벌은 개발독재체제에서 노동을 배제하면서 독재정권과 동업자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후 규제철폐를 요구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주동하면서 여전히 한국 경제에서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발전 전략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노동에 대한 착취와 배제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로 귀결되었고, 이런 억압적 노동규율은 재벌 주도 고투자를 가능케 한 계급적 조건임과 동시에, 재벌을 견제하고 민주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대항력의 약체를 낳은 계급적 , 권력구조적 조건이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약한 기업별 노조, 약한 진보정당이라는 점에서 재벌 해체 없이는 경제 민주화로의 이행은 요원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재벌을 민주적 시민기업으로 재편하기 위해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적 견제력, 규율력을 갖춘 제3부문을 강조한다. 즉, 국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재벌, 국제금융자본 사이에서 경제민주화를 강제할 수 있는 사회적 제3 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정책들을 제안한다. 동시에 노동과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의 필요성도 강조한다. 재벌과의 타협보다는 재벌에 대항할 수 있는 시민정치적, 제도 정치적 대항력을 키워 힘의 불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재벌 개혁은 시작될 수 있고 이는 경제민주화로 가는 노정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는 주장이다.


논쟁의 의의와 지향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사회구성체 논의’나 1990년대 말 동아시아 외환위기 직후 진행되었던 한국 경제 구조의 대안 체제에 대한 모색에 비해 이 논쟁은 논쟁의 대상이나 범위가 ‘어떤 자본주의를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즉 정책과 제도 개선의 문제를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는 한국 경제 상황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실현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능성들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은 이 논쟁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시되었던 다종다양한 정책과 제도들이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로 구체화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12: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