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 연구의 매력적 전망

이상욱 (한양대, 과학기술철학)



  우리는 지난 호에서 상식과 달리 과학연구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규정되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추구로 이해되기 어려운 특징을 갖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활용하면, 과학 연구는 역사적으로 맥락화된 상황에서 개별 과학자와 그가 속한 과학자 공동체가 적절하다고 받아들인 패러다임에 따라 수행되는 지적 노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21세기 과학연구를 다른 시기의 과학연구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이 직업 과학자의 급격한 증가라는 점을 살펴 보았다. 실제로 과학자(scientist)란 단어 자체가 1833년 영국의 철학자 휴얼에 의해 새롭게 고안된 단어이다. 휴얼은 이 단어를 통해 전통적인 자연철학자처럼 자연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추구하기 보다는 물리학, 화학, 지질학처럼 분과적 전문지식만을 추구하는 당시 과학 연구자들을 조롱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런 점을 간파한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 같은 사람은 과학자란 용어 대신 ‘과학 지식인(man of scienc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헉슬리가 보기에 과학지식이 갖는 철학적 함의나 거시적 사회문제와의 관련성을 도외시한 채 파편화된 지식 추구에 몰두하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과학연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과 어긋난 것이었다. 헉슬리의 이런 생각은 19세기에는 그다지 유별난 것도 아니어서, 20세기초까지 ‘과학자’란 단어는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극단적 전문화와 철학적, 사회적 쟁점에 대한 무관심을 바람직한 태도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20세기를 거치면서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세분화된 지식의 추구자로서의 과학자의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이는 지식의 축적에 있어 분명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20세기에 과학지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는 휴얼적 의미의 과학자가 과학연구가 갖는 사회적, 윤리적 함의에 대한 폭넓은 논의나 자신이 따르는 패러다임의 근본적 가정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벗어나, 쿤이 말하는 ‘문제풀이’에 집중했던 점이 주효했다. 이런 연구를 쿤은 ‘정상과학적’ 연구라 불렀다.

  하지만 정상과학적 연구가 분명한 대가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기존 패러다임을 벗어난 혁신적 연구를 억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양자물리학의 역사이다. 양자물리학이 20세기초 유럽에서 처음 등장할 때 그 기초를 놓은 물리학자들은 양자물리학의 수학적 구조만이 아니라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측정할 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와 같은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에 대한 탐구 역시 물리학 연구의 정당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물리학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입닫고 계산이나 해!(shut up and calculate!)라는 생각으로 대체되었다. 냉전 시기에 많은 수의 물리학자를 빨리 배출할 필요가 있었던 1950년대 미국대학 물리학과들은 물리 이론에 대한 성찰적 에세이 문제를 없애는 대신 수학적 계산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했다. 양자물리학의 해석과 관련된 진지한 고민은 ’철학‘이라는 딱지를 붙여 제대로 된 물리학자라면 멀리해야 할 주제로 무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이나 특수상대성 이론과의 모순 가능성을 이론적, 실험적으로 탐색했던 여러 물리학자들은 정통 주제 이외에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직업적 전망에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선구적인 물리학자들의 ‘비정상과학적’ 연구가 최근 물리학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양자물리학이 제기하는 개념적 문제에 대한 탐색은 현재 양자정보, 양자계산, 양자암호 분야에서의 이론적, 실용적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과학자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21세기 과학 환경에서는 역설적으로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비정상적’ 과학연구를 수행하기 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생산적 ‘외도’를 허용하는 연구 문화가 과학연구의 다양성을 지켜내고 과학연구를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활동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여기에 더해 21세기 과학자들에게 헉슬리가 강조했던, 분과학문적 과학자를 넘어선 ‘과학 지식인’의 모습을 기대하는 건 필자의 지나친 욕심일까?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08: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