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라는 거울

민승기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샤워를 마치고 나와 고양이의 응시의 대상이 되었을 때 데리다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동물의 시선에 노출되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철학자. 등을 돌려도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는 시선,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미 나를 보고 있는, 의미 부여나 명명 작업을 통해 제거할 수 없는 시선과의 만남. 망각하거나 길들일 수 없는 얼굴과의 마주함은 인간의 우월성에 상처를 낸다. 그러나 다시 인간은 이 ‘곤란한 만남’이 초래하는 결핍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방어한다. 데리다의 말대로 결핍을 지시하는 부끄러움은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 되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증거한다. 발가벗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발가벗고 있는 동물은 진실로 발가벗고 있지 못하다. 발가벗고 있음을 아는, 부끄러움의 능력을 가진 존재만이 인간일 수 있다. (능력의) 결핍이 지식을 통해 능력으로 바뀔 때 동물은 여전히 박제화된 개념이 되어 지배대상으로 축소된다. 동물의 희생이 속죄, 또는 문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동물’이 하나의 단어일 수 있는가? 동물은 동물이란 개념을 흘러넘치거나 그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데리다는 묻는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능가하는 부끄러움에 노출될 때 비로소 내가 된다

     부끄러움이라는 사건. 부끄러움이 지식 자체를 부끄럽게 하는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지배 개념이 되어버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자기반성적인 부끄러움. 자신을 자신에게 노출시킬 때, 부끄러움은 ‘능력’이 아닌 ‘상처받을 가능성’이 된다. 동물은 이성이나 언어의 결핍이 아니라 처음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을 인간과 공유하고 있는 ‘공-존재’(being-with)이다. 이제 부끄러움은 타자에의 열림이라는 수동성의 경험, 지식의 대상이 아닌, 지식 자체를 부끄럽게 하는 거울이 된다. 부끄러움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면, 그러나 동물의 시선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면, 동물의 시선에 노출되기 전의 나는 인간일까, 동물일까? 데리다는 묻는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능가하는 부끄러움에 노출될 때 비로소 내가 된다. 보편성이나 특수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singular) 동물의 시선에 사로잡힌 공간에서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이 탄생한다. 타자에의 열림을 공유할 때 인간과 동물은 ‘인간-동물’ ‘동물-말’로 변신한다. 인간과 동물의 대립 속에서는 사유할 수 없는 그러나 망각할 수도 없는, 대립 자체를 부끄럽게 하는 기원적 혼돈. 데리다가 하나이자 여럿인 키메라를 불러오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인간화된 동물을 발가벗기는 바닥없는 시선, 인간의 한계를 되뇌이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말건넴, 모든 대립적 차이를 와해시키는 동물 타자는 신까지도 분열시킨다.

     데리다는 동물의 명명작업 속에서 신의 분열을 읽어낸다.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동물들을 소집하고 인간이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보고 있는’ 신은 전능한 동시에 결핍되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어떤 이름이 부여될지 알지 못한다. 데리다의 말대로 명명 작업은 ‘신이 놀라움에 노출되는’ 사건이다. 고양이를 보면서 통제할 수 없는 고양이의 시선에 노출되어 현기증을 느끼는 철학자와 동물의 명명작업을 지배하지 못해 고통받는 신이 겹쳐진다. 인간의 결핍과 신의 결핍이 겹치는 곳에서 ‘동물이 생각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들이 고통을 겪을 수 있는가?’라는 부름으로 변형된다. 능력을 묻는 물음 보다 할 수 없음의 가능성 즉 고통의 공유가 먼저이다. 그러나 다시, 고통이나 죽음까지도 인간의 고유성으로 한정되어야 하는가? 데리다는 묻는다.

     ‘동물은 그러니까 나인 동물’은 말할 수 있는가? 언어 속에서 재현될 수 없는 ‘인간-동물’은 말해질 수 없는 타자로 남아 데리다의 텍스트들 속에서 출몰한다. 우리는 ‘언어와 모방의 능력을 박탈하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하여 ‘말과 뺨을 맞대고 우는 니체’와 만나고 있다. 인간화된 개념 속에서 박제될 수 없는 동물의 타자성은 키메라와 같은 다른 사유의 가능성으로 도래한다.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하는 거울에 노출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윤리적 주체.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17:4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