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의 역할갈등


  일반적으로 ‘역할’이라 한다면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를 말한다. 하지만 점차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고 업무가 전문화되어 분화됨으로 더 많은 역할이 요구되는 실정이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이 요구되면서 따르는 갈등 상황을 ‘역할 갈등’이라고 한다. 중·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에서나 볼 듯 한 내용을 장황하게 꺼낸 것은 강사들이 겪는 역할 갈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서이다. 현대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역할 갈등을 겪겠지만, 특히 강사들이 겪는 역할 갈등의 편차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강의를 위해 학교에 가면 학생들을 ‘교수님!’하며 나를 부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수와 시간 강사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을뿐더러, 이를 나누는 명칭 또한 분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학생들에게 나는 ‘교수’인 것이다. 최근에는 ‘교수’란 직업이 그리 존경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이기에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직업군 중 하나로 인정받는 편이다. 더욱이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직업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학생들로부터 존경 아닌 존경과 우대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조금만 발길을 돌리면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다.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 학생의 신분인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교수에게 주어진 역할과 학생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천양지차이다.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수료인 사람들에게 학생으로서의 역할은 배움보다는 잡무를 담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때는 일용직 노동자에 가까운 업무를 맡게 되며, 그에 따른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학교를 벗어나도 역할 갈등은 사라지지는 않는다. 집에 돌아가면 한 가정의 번듯한 가장이자 남편으로 혹은 아들·딸로서의 역할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매년 제자리만 맴도는 시간 강사 월급봉투로는 가정을 돌보기도 부모님께 효도하기도 어렵다. 물론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에 걸맞는 집 안에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회포나 풀자는 심정으로 친구들을 만나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제는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고 있는 친구들 앞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들이야 친구가 교수가 될 거라며 한껏 치켜세우지만, 덧없는 웃음으로 대답할 뿐이다. 그리곤 계산대 앞에서 슬쩍 발을 뒤로 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친구들이야 사정을 이해하겠지만, 스스로 인정되지 못함을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사실 어떠한 사람이 역할 갈등이 없겠냐마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 강사 신분의 사람들이 겪는 갈등의 폭은 너무도 크다. 더욱이 약속된 미래라곤 어느 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러한 역할 갈등 속에서 나를 달래는 것이라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점점 더 가까워 오는 ‘역할’의 무게 속에서 이 마저도 마음껏 할 수 없게 되어 가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역할의 홍수 속에서 오늘은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19:2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