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을 견디는 면역력


영상문화학과 협동과정 김해린



  대학원 석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화장품 파우치에 새롭게 자리 잡은 아이템은 소화제와 두통약 같은 상비약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잠시 걸어 다닐 시간도 없이 책상 앞에 다시 앉을 일이 많았던 것이 소화제를 갖고 다니게 만든 주요한 이유였다. 늦게 잠이 들어 잠시 눈만 붙인 뒤 후다닥 일어날 때가 많고, 학교 오는 길의 지하철 안에서 빵을 먹거나 수업 전 빈 강의실에서 몇 천 원하는 김밥을 허기를 달래기 위해 허겁지겁 먹는 경우도 많았던 탓에 몸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매 학기 매 계절이 바뀌는 전후를 따라 매번 감기가 찾아왔다. 감기에 안 걸려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고향집의 부모님은 일 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나를 보며 더 큰 병이 아닌가 걱정을 하시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 힘들어지자 일부러 병원에 찾아가서 링거를 맞고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억지로 잠을 청하며 근근이 몸을 달랬다. 파우치 안에 약은 더 자주 채워졌다. “허리 디스크가 없으면 아직 석사 논문 쓸 때가 아니란 증거 아니에요?” 박사 과정에 있는 동생은 한 학기 내내 아픈 내게 그런 자조적인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대전에서 내과 의사로 있는 친구 집에 2주 정도 머물렀던 지난 겨울, 친구는 자신의 집에 까지 감기를 달고 온 나를 보며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며 약을 끊어 보라고 권하였다. 어김없이 찾아온 감기 바이러스에 몸이 펄펄 끓었다. 38도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장 옷을 챙겨 입고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을 텐데, 의사 친구를 믿고 약도 끊은 채로 침대에서 앓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 과일 주스, 흰 죽. 친구는 모처럼 휴가를 나의 병간호에 반납하였다. 감기약 한 알이면 훨씬 나을 텐데, 해열제 한 알이면 금방 좋아질 것 같은데도 친구의 단호함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앓고 또 앓다가 밤이 되자, 열은 더 올라 38.5도에 다 달았다. 몸을 가눌 수도 없이 힘이 들었던 나는 친구에게 당장 병원이든 서울 집으로든 가야겠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자신이 데려다 주겠다며 나를 안심시킨 친구는 밤새 뜬 눈으로 물수건을 든 채 내 곁을 지켰다. 그날 밤이 고비였던 건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언제 아팠냐는 듯 체온계의 눈금이 36.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체온계와 친구를 번갈아 쳐다보며 조금 어이가 없어 흐흐 웃었다.      

신기한 사실은 그 날 이후부터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겨울에서 올해 봄으로 넘어오는 환절기에 주위 모든 사람들이 감기에 걸려 병원을 다니는 데도 불구하고 늘상 감기를 달고 살던 내가 멀쩡한 것에 대해 나 스스로가 의아해 하기도 했다. 아마도 끙끙 앓았던 그 날 밤에, 몸속에 감기를 견디는 면역력이 생긴 덕분일 거라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물을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감기 바이러스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석사 논문을 쓰다가 문득, 인생에도 그런 면역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감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부딪히고 부서지면서 도전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통증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상비약부터 꺼내 드는, 될 수 있으면 남의 뒤에 숨고 피하고 싶은 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점점 작은 고난과 어려움조차도 견딜 수 없는, 병원의 무균실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것만 같은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그러하다. 나의 친구처럼 ‘아파도 견디면서 너의 면역력을 키우는 게 중요해.’라고 말해 주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는 피해가고 고통은 돌아가며 쉽게 사는 게 최고라고 세상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신문은 작은 사건을 과장하여 밝히고 그를 보며 대중은 소스라치는 반응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같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이익을 돌보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바이러스 같은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게끔 꽁꽁 싸매고 들어앉는다. 어떤 집단이라도 가질 수 있는 갈등과 문제들이 발견될라치면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지고 만다. 삶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는 개인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의 연장선에 서 있을 것이다. 사회는 점점 면역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에게 누군가 물었다고 한다. 88년도에 자식과 남편을 잃은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이라고. 여전히 파우치 안에는 색색의 알약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다시금 감기가 찾아온다면 약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방에 늘 상비되어 있는 알약보다 나를 더 든든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감기 바이러스를 견뎌낸 내 자신이 아닐까. 오늘 날의 우리는 어려움을 견디는 인생의 면역력이 필요한 시대와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12: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