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로 보는 우리사회(1)


천지인, ‘청계천 8가’ (1993)

이경준(대중음악평론가)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 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솟은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워~워~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1

지하철 2호선 신당역을 나와 조금 걸어가면, 마주하게 되는 작은 거리가 있었다. 청계천이 복원되기 전, 그러니까 20년도 넘은 이야기다. 별천지였다. 퀴퀴한 먼지와 함께 세월을 품고 있는 LP 가게들, 밥솥, 냄비를 비롯한 각종 중고 물품들로 터질 것 같은 잡화상들, 반나절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배고픔을 달래주었던 잔치국수 한 그릇. 그리고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곱창의 기름진 냄새. 그때 나는 중3이었고, 아직 이 노래의 가사를 곱씹기에는 너무 어렸으며, 이 부근의 정경을 노래한 그룹이 있었다는 점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기억으로도 사람들은 무언가에 심히 목말라 있었음에 분명했다. 1990년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이 개봉하여 영화 키드들을 판타지를 자극했고,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메인스트림을 직격했다. ‘우리들의 천국’과 같은 캠퍼스 드라마 붐이 일었고, 패션에 대한 갈망도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대학가에선 이른바 ‘신세대 담론’이 싹을 틔웠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불거진 ‘신세대’는 원래 미국에서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세대를 가리키는 말로 텍스트보다는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문화에 경도된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이념이나 사상과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쾌락과 놀이를 중시하던 ‘그들’이 10년 시차를 두고 이식된 것이었다. 세상의 변화는 급격했다. 군부독재가 종말을 고하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란 것을 유치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선 조금씩 ‘먹고 살만하다’는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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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 모든 사회적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이 노래가 등장하기 불과 2년 전, 명지대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의해 희생되었다. 여전히 대학가의 시위는 거셌으며, 최루탄과 화염병이 흔하게 목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1990년대 초반은 의문부호가 따라붙는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족쇄가 풀린 거대한 욕망이 똬리를 튼 채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움직여갔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억압적인 국가장치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물론 갈등은 대학가 내부에도 존재했는데, 그 점은 ‘민족, 해방, 통일’을 다루는 노래와 ‘계급, 노동’을 다루는 노래의 충돌로도 여실히 확인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대립이 이어지던 즈음 등장한 천지인의 음반은 충격과도 같았는데, 불법 테이프로만 발매되어 대학가 서점을 통해 유통되었던 이들의 1집은 기존 민중음악 혹은 투쟁가가 다루지 못했던 록 음악을 본격적으로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렬한 일렉트릭 기타의 전면적인 도입은 민중음악 진영 내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특정 진영에서는 ‘미제의 앞잡이’로 매도당하기도 했으며 어느 공연장에서는 연주하는 도중에 무대 바깥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특히 몇몇 강성주의자들에게 ‘청계천 8가’는 어느 프티부르주아 (혹은 대학생)의 눈에 비친, 잔잔한 서울 어느 밤거리의 풍경, 즉 ‘싸구려 감상주의’의 전형쯤으로 간주될 만 했다. 이렇듯 논의가 활발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노래가 그만큼 사랑받았다는 방증이었다. 내 기억으로도 이 노래는 노래가 발표된 지 한참 후인 1996~7년 즈음 학교 앞 막걸리집(젓가락 장단에 맞춘 떼창을 허용해주던 공간으로 주로 운동권 학생들이 이용했다)에서 가장 많이 불리던 곡이었다.

이 노래가 그토록 회자되며 아직도 가슴 속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더 나아가 아름다운 가요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치기어린 계몽이나 강압적인 훈시를 제거한 서정적이면서도 솔직담백한 노랫말 때문이었으리라. 혹자는 이 역시도 서민(혹은 빈민)들과 떨어진 채 그들을 바라보는 ‘제 3자의 메타적 시선’이라 차갑게 냉소한 바 있지만, 이는 실은 모든 예술을 계급으로 치환하는 과도한 수사적 비판이었다. ‘청계천 8가’는 기존 운동권이 수없이 강조하던 ‘도덕적인 운동권 대 부패한 기득권’이라는 조야한 이분법 구도를 폐기한 채, 인간의 본질과 삶 자체의 약동을 가감 없이 스케치한 최초의 곡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은 ‘어쨌든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대전제로부터 발걸음을 뗀 이들의 음악은, 우리 중 다수가 어느 순간부터 그 사실을 망각한 채 관성처럼 접붙여진 수많은 ‘회색 영혼들’이라는 점을 고백하는데서 출발한다.


3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과거 청계천 8가의 흔적도 와해되었다. 재건축 아파트에 밀려 시장은 동묘 쪽으로 옮겨갔고, 많은 점포들은 문을 닫았다. 그런데 요즘 유명 버라이어티에 이 시장이 소개된 이후로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도 부쩍 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금 ‘어느 핏발솟은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이나 ‘어느 맹인부부가수의 노래’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장면이 희미해져도 노래는 여전히 그곳에 사람들이 모르는 채로 남아있다. 다만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이 사라져갈 뿐. 이제 노래의 자취, 상처, 눈물, 그리고 노래가 읽어냈던 것과 읽어내지 못했던 것들을 복기해보며 이 노래를 다시 불러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일상속의 작은 깨우침과 밥 한 숟가락의 무게를 알려주었던 노래의 꼬리를 더듬으며.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5: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