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투우장에서 시네마를 생각하다
:3D영화 시대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영화 체험의 근본적 성격에 관하여


이후경(영화평론가)


작년 11월, 한 달 월급을 헐어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보려고 노력했는데 정작 나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직접 눈으로 보진 못한, 투우 경기였다. 투우 시즌은 보통 3월에 시작해 10월에 끝나기 때문에 11월의 관광객에게 허락되는 건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빈 투우장을 구경하는 것 정도다. 하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투우의 강력한 매혹을 짐작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투우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운용되는 고도로 양식화된 쇼인 것 같았다. 설명에 따르면 투우장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 그 문들은 각기 다른 배역을 맡은 투우사들이 등퇴장하는 문, 소가 등퇴장하는 문, 비상시 부상자를 내보내는 문 등으로 구분된다. 그중 하나를 통해 화려한 복장의 주연 투우사, 마타도르가 먼저 등장하고 그의 소개가 끝난 뒤 소까지 입장하고 나면, 마침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이 부분이 결정적인 대목이다. 마타도르와 소의 대적은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는 투우장 한가운데서 15분 정도 진행되는데, 그것이 그들의 최초의 만남이자 최후의 만남이다. 잘 알려져 있듯, 한번 경기에 나간 소는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처형된다. 이는 만약 소가 두 번째로 싸울 기회를 얻을 경우 첫 번째 경기의 경험을 활용하여 투우사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를 죽여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규칙이다.
이런 규칙은 마타도르의 연기 패턴에도 고스란히 반영돼있다. 마타도르는 절대 같은 동작을 두 번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 반복하는 순간, 그는 소에게 목숨을 내어줘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방금 시작한 단 한 번의 경기를 통해서만 황소의 보폭, 성미, 완력 등을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오로지 일회적인 제스처의 교환을 통해서만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람도 소도 자신의 육체의 전부를 걸고 저 상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번 격렬하게 부딪쳐보는 행위. 투우란 그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나는 그런 투우의 본질에 상상적으로나마 빠르게 사로잡혔다. 투우란 제도화된 죽음이 어딘가 영화와, 정확히는 디지털 시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영화 체험의 속성과 꼭 닮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단 한번’이란 말 같다. 영화는 복제예술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한 관객으로서 느끼기에, 영화는 다른 공연예술만큼이나 일회적인 체험의 예술이다.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이 <디지털 영화 미학>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시네마의 미학적 경험은 복제될 수 없는 것이다. … 같은 프린트를 똑같이 반복해서 볼 수는 결코 없다.” 우리는 같은 영화라도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단 한번’ 만난다.

바로 투우처럼 말이다. 오손 웰즈, 세르주 다네와 더불어 투우에 깊이 매혹됐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투우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했다. “내가 어떤 투우의 모습을 그려내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이 볼 투우와 같지 않을 것이다. …(중략)…투우라는 것은 노래나 춤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 비영구적인 예술이며, 연기자가 사라지고 나면 그것을 본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그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죽어버리는 예술이다.”

우리는 영화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심지어 디지털 시대가 도착한 이후에는 더욱 자주 잊어버린다. 그러나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나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잊혀진 꿈의 동굴> 같은 3D영화들이 그 망각을 흔들어 깨운다. 그 영화들 앞에서 오늘날 관객은, 비디오 세대 이전의 관객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실은 비디오, DVD, 블루레이 세대 관객도 그러한 것처럼, 육체적 기억의 죽음과 싸워야 한다. 그 느낌을 알고자 한다면 그 영화들에서 받은 인상을 글로 옮겨 보면 된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3D 블루레이의 도움을 얻어도 좋겠지만 곧 그것들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적 경험의 일회적 성격과 그것의 복제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비평 언어의 한계는 3D영화의 시대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투우장 구경을 마친 뒤 기념품 가게에 들러 엽서 한 장을 샀다. 게이트를 나서기 직전인 소의 시점에서 촬영된 것이다. 소는 저 문을 통과하면 다시 저 문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 어쩌면 한 편의 영화 앞에서 우리도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얻을 뿐이다. 디지털이 많은 것을 바꾸어놓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오늘도 그 사실을 되새기며 곰플레이어를 끄고 영화관에 간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9:2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