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동향

현대 한국사회의 논쟁들(1)


한국에 근대학문이 수입 된지도 수십 년이 훌쩍 지났다. 그간 숱한 역사적 격변을 겪으며 한국의 학문도 지금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것을 진보의 역사라고 할 것이고, 혹자는 이를 정체내지 퇴행의 역사라고 평가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의 성격이 어떠하건 시간이 흐르면서 학계는 제도화되었고, 양적으로 팽창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적 논쟁이 생겨나기도 했다. 물론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논쟁이 빈번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논쟁들이 드물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 논쟁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했고,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기도 했다. 향후 한 학기동안 본지에서는 현대 한국사회의 논쟁들 중 몇 가지를 추려서 이것의 내용에 대해서 소개하려한다. 그래서 어떤 논쟁이 발생했고, 당시 학자들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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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자유기고가)

복지국가 성격논쟁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은 복지의 확대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관철인가?




복지확대론자: (김연명 교수 사진)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은 국가책임이 강화된 것이고 복지를 확대시킨 것. 자유주의 모델로 나아간 것이 아니다

보수주의 모델론자: (남찬섭 교수 사진)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은 개혁을 국가가 주도하면서 보수주의 모델의 계층화를 초래했다.

신자유주의론자: (신광영 교수 사진)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은 시장의존성이 강조된 신자유주의적인 것이다.



한국의 복지국가 성격논쟁은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내 사회복지학 및 행정학, 정치학계에서 벌어진 보기 드문 논쟁이었다. 복지국가 성격논쟁은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한 평가를 주제로 여러 학자들이 각기 상이한 입장들을 여러 학술지에 게재하면서 촉발되었다. 이 논쟁은 그것이 현실 정치와 정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서구가 아닌 한국사회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에서의 정책들을 준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지적처럼 논쟁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한국 복지 체제의 성격과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의 특징을 설명하는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었고, 다양한 영역에서 의미 있는 성과들이 도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논쟁은 ‘복지국가 성격논쟁’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판이 되었다.


논쟁의 준거: 에스핑 안데르센의 유형학

복지국가 성격논쟁은 1997년 위기 이후 나타난 사회변동과 국가의 복지정책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이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는 확대주의인가, 아니면 노동의 상품화와 노동복지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인가의 양극을 사이에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그런데 이 논쟁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이론적 준거틀에 근간을 두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회학자 에스핑 안데르센(Esping-Andersen)이 1990년 저서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에서 개진한 복지국가의 유형학이다.

에스핑-안데르센은 선진자본주의 복지국가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체제(regime)개념을 사용해서 구성원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규정하는 일련의 규범, 법칙, 과정과 제도에 주목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세 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복지국가들을 유형화하는데, 그것은 바로 시장 밖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탈상품화, 시민권과 사회계급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계층화, 그리고 시장, 국가, 가족 중 누가 복지를 제공하고, 복지정책이 어떠한 주체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는가를 의미하는 복지혼합이다.

이 세 기준을 바탕으로 에스핑-안데르센은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유형을 만들어 낸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모델과 독일을 전형으로 하는 보수주의 모델, 그리고 스웨덴을 주된 사례로 하는 사민주의 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자유주의 모델의 경우, 이들은 매우 낮은 탈상품화를 보이고 있으며, 빈곤층의 기초생활보장에만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고, 시장을 주된 기제로 하여 복지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독일과 같은 보수주의 모델은 이와 상이한데, 이들은 높은 수준의 탈상품화를 보이고, 계층화에 있어서는 위계질서를 중시하다보니 지위보전을 꾀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설계되어 있으며, 복지혼합에 있어서는 가족을 중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반면,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사민주의 모델은 아주 높은 수준의 탈상품화를 달성하고 있으며, 계층화에 있어서도 평등을 핵심적인 논리로 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이나 가족이 아닌 국가가 복지 제공의 주된 주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논쟁의 내용

에스핑-안데르센의 유형화를 준거로 먼저 성경륭 교수와 김연명 교수는 97년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은 국가책임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며 자유주의 모델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주로 정책에 있어 산출(output)적인 측면을 강조하는데, 이 시기 전국민 사회보험이 완성되었고 제도가 통합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법적인 사회적 권리가 확대되었고 무엇보다도 복지지출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 모델 혹은 신자유주의의 관철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남찬섭 교수와 김영범 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이 에스핑-안데르센의 유형 중 보수주의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에 있어 그것의 의도는 앞선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보편주의와 연대를 강조한 측면이 강하다고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복지 정책을 통한 개혁과정을 국가가 주도하게 되면서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에스핑-안데르센이 말한 보수주의 방식의 계층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반면 신광영, 조영훈, 손호철 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을 사민주의적 지향의 복지확대나 탈상품화의 증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정책의 내용과 성과에 있어서 국가의 실질적인 책임이 강화되기보다는 시장의존성이 강조되었고, 정책이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위기 이후 복지 개혁의 성격을 신자유주의가 관철된 것으로 파악한다. 즉 에스핑-안데르센의 유형화에 따르면 자유주의 모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논쟁의 숨은 핵심과 한계

그런데 김원섭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여러 가지 주장과 여러 차례의 열띤 논쟁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 이후 복지개혁의 성격에 대한 상이한 규정은 복지 개혁에 있어 정책의 산출과 결과(outcome) 중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다. 즉 그간의 논쟁은 복지정책의 산출과 결과에 대한 상이한 강조에서 발생한 것인데,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복지정책 산출에 있어서의 형식적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보수주의나 신자유주의 관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것의 실질적 측면을 중시하고 특히 후자는 불평등의 증가와 같은 결과를 강조한다. 또한 복지가 확대되었음을 주장하는 이들이 주로 빈곤의 개선 추이와 민간 복지 확대 추이의 둔화를 강조하는 반면, 신자유주의 관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책에 있어 실질적 효과의 미비를 논거로 주장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것이다. 이처럼 외관상 매우 복잡하고 열띠게 진행되었던 논쟁은 결국 정책에 있어 산출을 강조하느냐 결과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구분이 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논쟁의 숨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복지국가성격논쟁은 서두에 언급한 여러 의의들과 함께 일정한 한계를 또한 드러내고 있다. 여러 가지 한계점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논쟁이 기본적으로 에스핑-안데르센의 유형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유형론 그 자체가 주는 이점들 예컨대, 간결성이나 특정 사례에 대한 유추가능성의 증가와 같은 요인들은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유형론에 집착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도 적지 않다. 논쟁에 직접 참여한 정무권 교수는 한국의 복지국가가 발전하게 된 시기와 역사적 경로에서의 국내외적인 정치경제적 환경과 상호작용하에 형성되는 복지체계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들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 없이 단순히 유형론의 한 부분인 제도의 형식적 특징만으로 성격을 규명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14:5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