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을 위하여

민승기(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 교수)


또 다른 시작을 위하여 시작을 반복해보자. 철학이 시작되는 곳. 그 곳은 사랑이 탄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메티스(계책) 여신의 아들 포로스(방도)가 신들의 식탁에 참여한 후 넥타르에 취해 정원에서 자고 있다. 늘 배고픈 페니아(곤궁)가 구걸하러 왔다가 자신의 ‘방도 없음’(a-poria)을 해소하기 위해 포로스 옆에 눕는다.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이’(리오타르에게 ‘아이’는 어른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미성숙의 표지, 성숙함 자체의 결핍을 보여주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불멸의 신이자 유한한 인간. 지혜로운 방도를 가진 아버지와 어떤 방도도 갖지 못한 무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는 맨발에 집도 없지만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계책을 갖고 있다. 결핍과 죽음의 품에 안겨 있다가도 그것을 피하는 방책을 재창조하는 ‘삶이자 죽음.’ 라깡의 말대로 에로스는 ‘고유성을 갖지 못한’ ‘분류불가능한’ (지식의) 틈이자 혼돈인지 모른다.

에로스를 위한 잔치, 플라톤의 『향연』은 왜 신화로 돌아가는 것일까? 투명한 지식이 아닌 혼돈스런 에로스가 철학의 기원인가? ‘지식을 사랑’하는 철학은 이미 사랑이란 ‘틈’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신과 인간, 지혜와 무지, 방도와 방도없음, 남성과 여성, 풍요와 결핍, 삶과 죽음의 ‘사이.’ 에로스는 대립물이 일치하는 공간이다.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어 대립적 지식 자체의 결핍을 드러내는 공간(아닌 공간)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지식은 의미를 통해 혼돈을 제거하고 사랑을 명명하려 하지만 사랑은 명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지식 자체에 틈을 낸다. 지식의 한가운데에 난 사랑이라는 간극. 지식과 사랑은 유사성이나 차이로 해소될 수 없는 간극으로 남아 ‘지식을 사랑’하는 철학을 스스로와도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제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 대신 왜 철학을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리오타르의 말대로 왜?라는 질문은 질문 대상 자체의 소멸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기모순이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철학의 고유한 자질을 묻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와 불화하는 철학을 왜 하느냐?고 물어야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사이렌의 노랫 소리와도 같이 우리를 혼돈스럽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기된 채 님프를 쫓는 반인반수인 사튀로스(소크라테스)의 모습 속에는 영혼을 마비시키는 진정한 아름다움, 감추어진 보물(agalma)이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지혜라는 이 형언할 수 없는 보물을 교환하고자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보물은 텅 빈 간극일 뿐이다. “내가 실은 아무 것도 아닌 자인데 자네가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닐지 더 잘 살펴보게.” 보물은 알키비아데스나 소크라테스 모두 소유하거나 교환할 수 없는 빈 공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 역시 보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빈 공간이자 자신의 빈 공간인 ‘보물-텅빔’과 마주하도록 한다. 리오타르의 말대로 소크라테스는 텅빔을 실정적 대상으로 물신화하려는 알키비아데스의 시도를 중지시키고 있다. 더 이상 잃어버려서는 안될 소중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독배를 마셨던 것이다. 그러나 부재로서 현전하는 빈 공간과의 만남이 알키비아데스를 사랑받는 대상에서 사랑의 주체로 변화시킨다. 철학은 자신이 갖고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지혜라는 텅 빈 대상과의 대면이다. 지혜이자 무지이며 삶이자 죽음인 에로스와의 만남 속에서 보물은 이미 항상 상실된 그러나 다시 재발견되어야 하는 것으로 남는다. 또 다른 시작은 사유가 에로스라는 혼돈의 공간에 노출될 때, 명명할 수 없는 틈과 마주할 때 가능하다.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왜 사유하는가?로 바뀔 때, 왜?라는 틈이 사유 속으로 기입될 때 새로운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작인 삼월에 철학의 원초적 장면으로 되돌아 가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13:4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