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  한홍구,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겨레출판, 2014.


‘신유신의 밤’에 역사의 등불을 밝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헌법 정지 선언을 들은 지식인들은 그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신유신의 밤> 中 (《유신》, 435쪽)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던 2012년 12월 19일 밤, 통렬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은 이가 있다. 날카로운 필치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해온 역사학자 한홍구가 바로 그다. 《대한민국史》, 《특강》, 《직설》, 《지금 이 순간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를 종횡무진 활보해온 그가 이번에는 ‘유신’을 향해 펜을 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으로 유신시대가 다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된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을 막기 위해 <유신과 오늘>을 《한겨레》 지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고 <유신과 오늘> 연재는 그에게 중단할 수 없는 과업이 되었다. 지난 2월 14일 목요일 저녁 7시 반, 홍대역 인근 카톨릭회관에서 역사학자 한홍구를 만나 《유신》 출간에 대한 소회를 들어보았다.


유신이 오늘이 되어버린 시대

“처음 《유신》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원로 역사학자 이만열 선생님의 조언에 있습니다. 이만열 선생님께서 박근혜가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던 당시 역사학자가 유신에 대한 연구를 제출할 임무가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고 현대사를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유신과 오늘>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를 자신의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박근혜는 단순한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의전서열 제2위인 유신정권의 퍼스트레이디죠. 박근혜의 당선 이후 유신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공안검찰의 상징 김기춘이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었습니다. 유신시대의 열혈 청년장교였던 남재준은 국정원장이 되었죠.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군사독재, 정보정치, 공안검찰과 싸워 왔는데 이제 그 세 가지가 한꺼번에 부활한 것입니다.”

그는 유신체제의 폭압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것과 제대로 싸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 유신시대에는 각종 내란 음모죄 사건들이 줄지어 나타났지만 박정희야말로 헌정 질서를 유린한 내란죄의 범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내는 움직임들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신시대의 잔혹한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유신시대는 명백하게 죽음의 시대였습니다. 최종길, 장준하와 인혁당 관련자들만 희생된 게 아닙니다. 유신시대는 1년에 1,500명의 젊은이가 소리 소문없이 죽어도 입 한 번 뻥끗할 수 없는 시대였죠. 1974년 말 민주회복 선언에 서명한 백낙청 교수는 파면되었고 1974년에는 교수재임용 제도를 도입해 전국 98개 대학에서 460명의 교수를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모든 비판이 봉쇄되고 표현의 자유도 철저히 억압된 시대였죠.”


진정한 경제 성장의 주역, 저임금 여성 노동자

그는 박정희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해서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히틀러는 독일 내전과 연합국의 약탈적 배상금 징수로 피폐해진 독일 경제를 재건했고, 스탈린은 유럽의 변방 러시아의 후진 자본주의를 미국과 소련의 양강 구도로 재편했습니다. 김일성 또한 한국 전쟁 이후 무너진 북한 경제를 재건했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 독재 정권의 과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로 박정희 집권 시기에 경제가 발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박정희 개인만의 업적이었을까요? 유신 시기 실제 경제성장의 주역은 여성노동자, 저임금 노동자였습니다.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YH, 남영나일론과 같은 곳에서 가발, 스웨터를 만들고 방직 기계를 돌리던 여공들이 당시 경제 성장을 견인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면 그 역사는 반드시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그 성취의 진정한 주역은 박정희도 아니고 몇몇 이름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죠. 《유신》에서는 특히 이들 여공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신시대에는 없지만 오늘날에는 있는 것

“유신시대는 명칭부터 100년 전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베껴온 복고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반동의 시기는 맑스가 생존해 있던 시대에도 있었죠. 맑스가 살아 생전에 황제의 즉위를 지켜보았는데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겠습니까. 역사가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말의 진의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되살아나려는 유신시대를 한갓 역사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 신유신시대를 역사의 희극으로 만드는 것은 새 세대의 몫입니다. 70년대 혹은 80년대와 오늘날의 다른 점은 당시에는 지식인의 수는 적었지만 열심히 싸웠다는 점입니다. 유신시대와 비교할 때 2014년의 대학교수와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의 수는 수십배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유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지식인은 불행히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개인의 힘만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박정희의 유신정권과 현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고 연대를 촉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서웠다. 그는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2017년 대선이 다가오기 전에 진상을 규명하여 엄중히 책임을 묻고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신시대에는 없지만 오늘날에는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은 집회나 시위를 하면 만 명도 모이지 못했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경우를 볼 때가 있어요. 하지만 유신시대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을까요? 채 500명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민주노총도, 전교조도, 참여연대도 없었고, 진보정당이나 진보언론, 페이스북, 트위터도 없었어요. 우리는 50:50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100:0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민주화는 끊임없는 과정이지 단판승부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승리의 기억’을 복기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1979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반유신 데모가 일어났을 때, 시위의 주체는 도시룸펜, 영세상인, 무직자 등 도시 하층민이었습니다. 우리는 중고생들과 시위했던 과거, 5·16에서 무너지고 유신에서 무너져도 6월 항쟁으로 일어섰던 과거를 기억해야 합니다.”


현실과 호흡하는 학문이 필요한 때

마지막으로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한 조언을 묻자 한홍구 교수는 ‘현실과 호흡하는 학문’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현실과 호흡하는 학문이 중요합니다. 유신시대는 우수한 인재들이 마음놓고 공부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물론 당대 현실과 호흡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현실과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대 민중들의 삶과 자신의 공부가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6:3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