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무엇이 성실한 공무원을 대량학살자로 만드는가?

이지은 (자유기고가)


전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 있던 1943년의 어느날, 미국에 망명해 있던 한 사상가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다. 유럽의 전역에서 밤낮으로 송장 공장이 가동되었다는 한 방송사의 뉴스가 그녀에게 들려온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는 연구를 시작한다. 독일 유대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전체주의 정권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전체주의의 기원』의 초고는 1949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히틀러의 독일이 패배한 지 4년 후, 그리고 스탈린이 사망하기 4년 전쯤의 일이었다. 1951년에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 초판본 서문에서 아렌트는 무모한 낙관주의도 분별없는 절망도 거부한 채 전체주의를 이해하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일어났는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전체주의의 기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한 정치사상가의 간곡한 시도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렌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정치현상인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분석한다. 인간을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복속시키고 복속되지 않는 인간을 체계적으로 학살한다는 점에서 나치와 볼셰비키는 공통적이다. 전체주의 정권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기에 그것은 전제정, 과두정, 민주정과 같은 기존의 통치형태로부터 연역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 정권에 나타나는 ‘전례 없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귀납적으로 분석한다.


‘쓸모없는 인간의 경험’이 전체주의를 키운다

단순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반유대주의’, 단순한 정복이 아닌 ‘제국주의’, 단순히 독재가 아닌 ‘전체주의’는 19세기 이후 차례로 등장하며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모해갔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이전에 등장했던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히틀러 집권 이후 아리안족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모하는 과정을 고찰한다.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의 세 요소는 나치운동, 전쟁, 인간도살장의 설치로 이어지는 전체주의의 촉매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정권의 등장이 현대사회에서의 폭민(mob)의 등장과 무관치 않다고 강조한다.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전체주의의 시도는 과잉 인구로 시달리는 지구에서 자신들이 별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 대중의 경험을 반영한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 유대관계가 없고, 단지 당원 자격으로부터만 사회적 존재의 근거를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전체주의의 광풍에 휩쓸린다.


전체주의는 반복될 수 있다

전체주의 정권은 다른 방식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찾기 힘든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준다.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주된 통치 원리로 삼은 채 개인들의 개별성을 말살한다.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행위를 도출해내는 데 익숙해진 개인들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다. 전체주의 정권 동안 상습적으로 발생한 테러는 개인에게 자연운동 혹은 역사운동에 겸허히 순종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개인들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한 채 나치와 볼셰비키가 선포한 거짓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어 자연법칙과 역사법칙이라는 안정적이고 초월적인 환상을 붙잡는다.

아렌트는 나치 독일의 몰락이나 스탈린의 죽음으로 전체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왕정, 공화정, 참주정치, 독재정치, 전제정치 등 각기 다른 정부 형태들이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등장했지만 인류 역사를 줄곧 따라다닌 것처럼 말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정부는 우리에게 하나의 잠재력이자 항존하는 위험으로 존재할 것이라 경고한다.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고 세계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무관심한 존재로 만들 때 전체주의의 악령은 다시 우리를 엄습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역자인 이진우의 말을 빌려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이 사회는 우리를 필요한 존재로 대우하고 있는가 아니면 쓸모없는 잉여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14: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