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칼럼]

벽에 대하여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양정현



  나는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단순히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는 것 이상의 정리를 즐겨한 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는 행거에 걸린 옷걸이들의 간격을 맞추거나, 책꽂이의 책들을 출판사 별 또는 커버 재질·크기 별로 꽂는 행동을 들 수 있다. 그릇 등 세간살이는 찬장에 열을 맞춰서 배치하고, 옷은 걸어두는 것과 개어두는 것으로 나뉘는데 특히 반팔 티는 동그랗게 말아서 정리한다. 모자는 신발 정리와 같은 방식으로, 걸지 않고 하나씩 나열해두고, 드라이하는 옷들은 커버에 넣어서 그들끼리 걸어둔다.  

  이상은 옷이나 책과 같은 생활 속에서 비교적 이동이 적고, 동선도 크지 않은 경우들을 들었는데, 그 밖에 휴지, 리모컨과 같이 항상 집안에서 이동해 다니게 되는 성격의 물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용 후 거실의 식탁, 책상 등 고정된 위치에 각을 맞추어 두게 된다. 또한 꼭 형체가 있는 것만이 정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형의 사물도 정리하는 방식이 있는데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을 감상한 후에는 엑셀 목록에 해당 영상정보를 기입·정리해둔다.

  주변에서 나의 이러한 습관을 이야기할 때에는 소위 정리 벽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국어사전에 벽(壁)은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장애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정의되어 있는데 아직 극복하고자 뜻을 세워 실행해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벽 때문에 주변에 끼치게 되는 실례, 혹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정리하는 시간과 장소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예를 들면 손님이나 친구가 방문했을 때 그들이 머무는 거실에서의 휴지는 정해진 위치에 두어질 필요가 없지만, 내가 앉아있는 방의 휴지 위치는 고정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정리 벽 때문에 생겼던 사건·사고들을 열거하진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벽에 대해서 이처럼 나름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이 벽이 그동안의 삶 속에서 원초적으로 발휘되어왔던 기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자취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비로소 내 공간, 내 물건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정리하는 습관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세간살이는 늘어나고 주거공간도 옮기게 되면서 습관이 벽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대학진학 시기의 사회적 환경 변화가 나의 삶과 성격에 영향을 미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벽이 지속될 것이라 장담할 수 없고, 또 다시 어떠한 기점이 나를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거에는 벽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느낌 때문에 이것에서 스스로 벗어나야하며, 그러면 마치 내 자신이 크게 해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나의 벽에 대하여 그것이 형성된 원인과 배경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 자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한편 주변 사람, 친구들은 내 정리 벽의 정도와 범위를 시험·가늠해 보며 나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때로는 긍정적인 해석을 붙여 주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나는 피그말리온 효과로 인해 이 벽을 잘 유지해 보고자 노력하는지도 모르겠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4:5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