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장르]

장르의 상투성에서 장르의 활력으로

남다은(영화평론가)


우리가 흔히 습관적으로 말하고 이해하고 사용하는 ‘장르’의 모호하고 무궁무진한 힘에 대하여.



연말을 맞이해서 올해 독립영화들의 경향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종종 받는다. 경향을 짚어내는 일은 수많은 구체적인 작품들을 범주화하는 것이므로 딱히 내키는 작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을 꿰뚫는 몇몇 문제들을 대면해야 했는데, 그들 중 하나는 장르에 안착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장르로 도피하고자 하는 현상이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인가? 이 질문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다시 말해질 수 있다. 영화에게 장르란 무엇인가?

수잔 헤이워드는 <<영화 사전>>에서 장르를 이렇게 정의한다. “장르는 단순한 포괄적인 목록화 그 이상이다. 장르는 단지 영화의 형태만이 아니고, 관객의 기대와 가설에도 관련된다. 그것은 또한 장르적 구조의 재료가 되고 그것을 구성하는 특수한 제도적 담론의 역할과도 관계한다. 다시 말하면, 장르는 제작, 마케팅(배급과 상영을 포함한), 소비(수용), 이 세 가지 과정을 아우르는 일부분으로 여겨져야 한다.” 달리말해, 장르는 영화를 유형과 종류로 범주화하는 틀이자, 관객이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해도 기대심리를 자극해서 선택하게 만드는 윤곽선이다. 그래서 ‘장르’는 규정적이고 고정적이며 상투적으로 어떤 특정 범주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장르의 생태계는 실은 경계가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우리가 특정 작품을 공포, 스릴러, 멜로로 구별하거나 성장기 영화, 로드무비, 시대극 등으로 구별할 때, 그 구별은 그저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실제로 그런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장르라는 윤곽선은 관객이 예상 가능한 범위를 만족시키면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들의 삽입으로 호기심을 지속시키며 스스로를 지탱해야 한다. 최소의 장르적 법칙 같은 것을 의식하되, 관객의 기대심리, 사회적인 변화, 산업적인 요구 등에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이 장르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장르영화들은 위의 정의로부터 더 과감하게 나아가, 자신의 기반인 그 틀을 문득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리고 그 틀이 부서지는 과정을 응시하며 그 틀로는 포괄할 수 없는 과잉되거나 결핍된 순간을 품는다. 이를테면, 존 포드의 서부극이 위대한 건 그의 영화가 서부극이라는 틀 안에서 서부극의 관습적인 기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혹은 프란시즈 포드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가 위대한 건 갱스터 장르 한 가운데에서 그 틀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기입하기 때문이다. 혹은 멜로드라마의 거장으로 불리는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들이 위대한 건 사랑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거나 견디게 하는 사랑 이외의 얼룩들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장르 영화들에서 장르라는 틀은 극화의 법칙이 아니라, 자신의 균열을 바라보는 거울에 더 가깝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조건,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법칙들을 낯설게 쳐다보는 일. 거기서 장르적 활력이 나온다.  

하지만 모든 영화들이 자기반성적으로 장르를 취하는 건 아니다. 관객들 또한 낯선 세계를 친숙하게 감상하게 만들어주는 장르들, 즉 세계의 울퉁불퉁한 부분들을 매끄럽게 다림질해서 하나의 완결된 틀로 보여주는 영화들에 더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자본과 타협해야 하는 상업영화들의 경우라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최근 몇 년간 독립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좀 우려스럽다. 유사한 사회적인 소재들을 동일한 장르적 문법으로 풀어내는 수많은 영화들에게 장르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사유하는 틀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을 성급하게 봉합하거나 미루거나 그저 미학화하는 기능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보니 문제의식보다는 이미지에 대한 욕망, 클라이맥스에 대한 욕망이 앞서고, 작위적 설정들이 난무하며, 결국은 구체적인 세계의 결들이 아닌 추상적인 뼈대만이 영화들을 지탱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장르는 세계를 다르게 감각하고자 하는 새로운 눈이 아니라, 세계를 경직되게 퇴행적으로 반복하는 틀에 불과하다.  

그러니 다시 질문해보자. 무엇이 우리를 장르적 세계에 매혹되게 하는가? 거기에는 언제나 자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그렇게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지함으로써 마주해야 하는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가 불안과 욕망에 시달리는 힘으로 장르를 나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그 어떤 언어나 틀로 재단할 수 없는 장르적 감흥과 생기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3: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