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일리아스』, 도서출판 숲, 2007.

당신에게 들려오는 일리아스

이준석 자유기고가


정말이지 잘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놀고먹고 싶은 것은 아니다. 주어진 과업들로부터 무책임하게 도망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가끔 아주 잠깐이라도 약간의 설렘을 동반한 편안함이 그리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떠난다. 영화와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소망하는 바를 포착해낼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일 것이다. 나를 완전히 매혹시키는 이야기, 그간 나를 속박했던 숱한 고민들이 소멸하는 찰나를 제공하는, 그러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답답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나를 새롭게 잡아끄는 이야기. 이야기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거창하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고전의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일리아스』라는 제목을 알고 있지만, 『일리아스』를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일리아스』를 ‘들어본’ 사람은 더욱 적을 것이다. 그리스 서사시는 묵독이 아닌 낭독을 위해 창작되었다.


함선 목록은 왜 이렇게 긴 것인가?

고전은 한 번 읽어도 좋지만 다시 읽어도 좋으며,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결코 그 가치가 완전히 소진되지는 않는다. 『일리아스』를 처음 읽는 독자는 주로 작품의 중심서사를 파악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줄거리에 관심을 기울일 때 총 24권으로 구성된 『일리아스』의 2권에 나오는 함선 목록 따위는 불필요한 과잉으로 여겨진다. 속히 『일리아스』를 다 읽어버리고자 하는 독자는 서둘러 3권으로 넘어가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를 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고전은 결코 완전히 장악되지 않는 텍스트다. 두 번 세 번 『일리아스』를 읽다보면 이 무의미해 보이는 함선 목록을 한 번 쯤은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게다가 『일리아스』를 누군가가 낭송해주는 글로 여길 때 2권의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함선 목록을 대하는 독자의 태도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낭송자는 청취자에게 책장을 미리 넘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서의 주도권을 지닌다. 듣는 자는 줄거리를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잠시 거두고 다만 들려오는 말과 그것이 환기시키는 이미지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개성을 지닌 각각 세력들이 함선 열 척 스무 척 정도씩을 이끌고 그리스 전역에서 트로이를 향해 몰려온다. 몇몇 장수의 이름만을 듣고 넘어갈 때 『일리아스』는 개인 간 결투를 다룬 것처럼 여겨진다. 아카이오이족과 다나오스 백성들 정도까지 들으면 『일리아스』는 지역 및 도당 간 쟁투를 떠올리게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함선 목록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침내 도합 천이백여 척에 가까운 함선들이 도착해 수만 수십만의 병사들이 도열한 이미지에 도착한다. 이때 청취자는 세계대전의 압도적 전운을 느끼게 된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에서 태어나 그리스를 벗어나지 않고 자란 기원전 사람의 위치와 시선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는 전 세계가 한 곳으로 몰려드는 것 같은 웅장한 힘의 흐름을 함선목록의 나열로부터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감각적 인상의 반영 그리고 반복의 문체

호메로스 서사시의 뚜렷한 문체적 특징 중 하나는 추상적 표현의 배제와 감각적 인상의 반영이다. 『일리아스』의 인물들은 수식어를 달고 소개된다. 어떤 가문 및 종족이며 누구의 자식인지 족보를 언급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도 장식처럼 이름 앞에 딸려온다. “흰 팔의 여신 헤라”, “빛나는 눈의 여신 아테네”, “장발의 아카이오이족”,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 “준족 아킬레우스”, “모래가 많은 퓔로스의 왕 네스토르”, “머릿결 고운 헬레네”, “어깨와 가슴이 아가멤논보다 더 넓어 보이는 오뒷세우스”. 이러한 수식어는 본문에서 반복된다. 반복은 낭송자의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청취자는 묘사의 반복을 통해 신들과 영웅들의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묵독하는 사람과 달리 청취자는 자신의 두 눈을 종이에 파묻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낭송자의 구체적인 묘사를 들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흰 팔과 장발을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청취자는 어떤 순간 누군가의 흰 팔을 바라보며 그로부터 필멸자가 아닌 영생자로서의 신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사람이 신처럼 보이는 경탄의 순간과 마주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아직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다 읽지 못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13:2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