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낮고 쓸쓸한 대학원생

어느 대학원생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집에 가다 초등학교 동창 J를 만났다. J도 나도 한 동네에 계속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 년에 두세 번은 집 근처에서 J를 만난다. 밤 11시 반쯤이었다. 나는 가방 없이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대학원에 온 뒤 가방을 잘 메지 않는다. 대신 내가 도서관에 종일 매어져 있다. J는 나에게 언제까지 공부할 거냐고 놀린다. 이놈은 늘 인사가 이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는 공부 지겹지 않냐고도 한다. 지겹지. J와 나는 2층 스몰비어집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주로 내가 묻고 J가 답을 한다. J는 보험판매원이다. 나는 J가 하는 말을 대체로 이해한다, 고 생각한다. 20대 후반, 집에서 지원 받는 것 없음, 불안정한 직장, 에 해당하는 남자가 내놓는 사회생활담은 전반적으로 엇비슷하다. J는 오늘 보험 계약을 몇 건 따냈다. 어쩐지 벙글벙글하더라. J는 들떠서 자기가 관리하는 고객이 어느 정도 규모를 넘으면 억대 연봉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J는 광고를 때려 박는 국내 보험회사는 그 때문에 보험료가 높은데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른다고 답답해한다. J는 외국 보험회사에서 일한다. J는 한 달에 백 오십을 벌 때도 있고, 천만 원 가까이 벌어본 적도 있다면서 이 일이 마약 같다고 한다. J는 일주일에 한 번 크로스핏을 한다. J에 따르면 몸이 좋으면 사람들이 함부로 손찌검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는 J가 나에게 묻는다. 살만해?

일단은 살만하지, 라고 답한다. 이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한다. 저녁 때 도서관에서 읽은, 근대적 자아관에 대하여 현대 철학자들이 비판하는 내용을 들먹일 수는 없겠다. 며칠 전 시간 강사 선배와 ‘미래 없는 박사’를 주제로 농담을 주고받은 이야기는, 진짜로 웃긴 이야기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가 아니면 냉담할 것 같아서 꺼내지 않기로 한다. 결국 해도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대학원생이야말로 한량이지, 책 읽고 글 쓰고, 라고 싱겁게 답한다. J는 내 생활이 부럽다고 한다. 자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안 해서 발로 뛰는 일밖에 할 일이 없는 것 같다고 한다. 힘들겠지만, 결국은 교수가 되는 것 아니냐고 지겨워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도 한다. 이 자식아, 교수가 되려면 실력과 운과 줄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해서 주로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학부 때부터 치면 9년째야. 이게 아주 막막하고 씁쓸하다고. 나는 이런 식으로, J에게 내 짠한 이야기보따리를 풀까 하다가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냥 웃는다. 그래, 고맙다. 너도 꼭 보험판매왕 되라.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에게 내 대학원 생활에 대하여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나도 ‘20대 후반, 집에서 지원 받는 것 없음, 불안정한 직장(?)’에서 일(?)하는 연구 노동자인데, 내 사회생활담은 친구들이 겪는 그것과 상당히 다른 듯하다. 단순히 내가 말주변이 없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대학원 밖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대학원 생활을 말하려고 하면 무언가 자꾸 ‘번역’을 해야 할 것 같은, 소통이 되기보다는 대학원이라는 생태계가, 대학원생이라는 생물 종(種)이, 그 생물이 구사하는 언어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할 따름이라는 느낌만 확인하기 일쑤다.

왜 이런가. 보험판매원인 친구는 보험사에 다니면서 고객에게 보험을 팔고 돈을 번다. 기자인 친구는 언론사에 다니면서 독자가 읽을 기사를 쓰고 돈을 번다. 교사인 친구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 돈을 번다. 그렇다면 대학원생은? 대학원생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 돈을 낸다? 다소 거친 표현이 허락된다면, 딱 봐도 졸라게, 마지막 문장만 다르지 않은가. 앞에 세 문장은 결합 법칙이랑 선택 법칙을 따라서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진 것 같은데 마지막은 확연히 그 구조가 다르다. 대학원생을 설명하는 문장 구조가 상이한 만큼, 대학원생이 경험하는 사회 구조가 이질적이며, 이로부터 대학원생들은 실존적인 고독을 경험한다, 고 주장한다면 비약도 한참 비약이겠지만, 여하간 전업 대학원생으로 지낼수록 일반적인 삶에서 멀어지고, 일반적인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금 J가 물은 ‘살만해?’를 생각해본다. 이때 살만하다는 말뜻은 무엇일까.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고 있니, 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J가 의도한 바는 보통 사람들이 기대하는 몇 가지 세속적인 조건에 견주어 보아, 그것을 충족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혹은 장차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별로 살만한 상황이 아닌 듯하다. 박사학위를 받기 이전에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내용을 써먹을 수 있는 자리가 거의 없다. 더욱이 연구 노동자로서 주로 하는 일이 학술논문 쓰기라고 할 때, 내가 전공하는 분야는 학술논문을 투고해서 심사를 통과하면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입비다 게재료다 하며 보통 20만 원쯤 내 돈을 낸다. 연구가 꼭 돈으로 보상받아야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가 열심히 연구결과물을 생산해도 경제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은, 여러 일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연구자 노동 구조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결정에 따라 ‘공부하는 학생’으로 남은 주제에, 세상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동료 연구자도 몇 사람 외에는 관심 없는 작고 좁은 주제로 글 쪼가리를 쓴 주제에, 살만하기를 바라면 안 되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대학원 신문에 기고하는 이 글은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결코 적지 않은 원고료를 받는다. 덕분에 며칠은 살만해지겠다.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