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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경험하기 힘든 UN총회를 본교 학생 안이슬(미디어08) 씨가 직접 다녀왔다. 안이슬 씨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UN총회 제 3위원회 사회개발 회의’를 다른 학생과 공유하고 싶다고 고대신문에 전했다. UN총회의 참석과 반기문 UN사무총장과의 만남까지. UN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원문의 수정을 최소화하여 지면에 싣기로 결정했다. - 편집자 주

  
저는 지난달 3일과 4일,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youth delegate)로 제 66차 UN총회에 파견을 다녀왔습니다. 공항 가는 길에 떨리기도 하고 많이 설레던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는데요, 대학생으로서 얻기 힘든 UN 총회에서의 경험을 우리 고대 학우들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파견된 UN총회 제 3위원회의 사회개발 회의는 이틀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첫째 날 아침에는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는 UN패스를 발급받고 우리나라 외교부의 담당 서기관과 함께 총회가 열리는 본부 회의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첫 날 아침부터 서기관의 설명을 들으며 정신없이 회의장으로 뛰어 들어갔는데요. 이 순간부터 UN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사람이 하이힐을 신고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많이 달릴 수 있는가’를 몸소 체험하는 숨 가쁜 일정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참여한 3위원회의 사회개발 회의는 중간에 2시간 정도의 점심시간외에는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됐습니다. 총회 기간의 모든 회의는 오후 6시에 마무리가 되고 점심시간에도 본부 내의 수많은 회의실에서 각종 회의가 쉴 새 없이 진행됩니다. 사회개발 회의에는 대사 직급의 각 국가 대표들이 참석하는데 회의장 안에는 국가별로 좌석이 배정됩니다. 우리나라는 회의장의 정 가운데 자리였고 ‘Republic of Korea’라고 써진 팻말 옆에는 발언 순서에 맞춰 켜지는 마이크가 있었습니다. 의장이 미리 정해진 발언 순서에 따라 해당 국가를 호명하면 그 나라의 대표가 7분 정도 발언을 하고 그 후에 다음 국가를 호명해 발언을 듣는 식으로 회의가 이어집니다. 중간에 다른 나라가 끼어들어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대표 발언이 끝나면 손을 들고 첨언을 하거나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당연히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는데 정말 상상하실 수 있는 모든 형태, 그 이상의 영어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0개 국가의 수만큼이나 200개 스타일의 영어로 의사소통이 이뤄지며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발음의 유창함보다 세련된 외교적 표현과 발언의 내용 그 자체임을 실감했습니다. 핀란드에서 온 청소년 대표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옆에서 모든 회의 내용을 수화로 전달해주는 담당관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기억도 있습니다.

저와 같은 청소년 대표가 파견되는 것은 흔한 경우는 아니고, 올해는 총 19개국에서 학생 30여명이 파견됐습니다. 만 18세부터 24세 이하 청년들을 지칭하는 청소년 대표들은 모두 대학생이었습니다. 청소년 대표는 해당 국가의 대표가 7분 정도 발언을 한 후에 이어서 2분 정도의 짧은 발언을 하게 됩니다. 패기 넘치는 청년들답게 좀 더 강한 표현을 쓰고, 밝고 확신에 찬 어투로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굉장히 활력 넘치고 공격적인 분위기는 아닙니다. 발언 내용은 굉장히 제한적이고 회의 분위기도 정적(靜的)입니다. 저도 파견되기 전까지는 정부 관계자 분들이 ‘재미없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무슨 말일까 싶었는데 회의장에 앉은 지 30분이 지나자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들 번역기를 귀에 꽂고 묵묵히 자신의 발언문 수정에 집중하거나 다른 나라의 입장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기 바쁩니다. 저도 현장에서 발언문을 수정할 때 가장 무난한 주제를 택했는데 교육의 기회를 가능한 많은 청소년들에게 부여해야 하며 이것이 빈부격차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는 포괄적인 내용을 서술했습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실제 회의장에서는 정말 이러한 뻔한 이야기들이 놀라울 정도로 반복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조금 독특한 내용의 발언도 있고 담담히 이어지는 회의 중에 귀를 솔깃하게 할 만큼 강한 어조로 말을 하는 대표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핵폭탄이 될 만한 민감한 사항들을 건드리기 보다는 그 주위를 에둘러가며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회의장에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건드리는 것은 외교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것이라는 조언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각 국가의 대표들이 단상에 앉은 의장의 호명 순서에 맞춰 하루 종일 돌아가며 발언을 하고 오후 6시가 되면 회의는 종료됩니다.

둘째 날은 우리나라 외교부 신동익 차석대사의 발언에 이어 제가 발언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뉴욕에 도착한 10월 1일부터 제 발표가 있던 4일까지 총 수면시간이 10시간이 채 안될 정도로 부담감을 가지고 발언문 수정과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발표 당일에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숙소를 나섰는데요. 동이 트기도 전의 뉴욕 거리를 헤치며 UN본부로 향하던 그 날의 기분은 긴장과 설렘이 오묘하게 섞여 가슴 벅찬 느낌 그 자체였습니다. 회의 개최 시간인 오전 10시 반이 가까워오자 제 발언문과 신동익 차석대사님의 발언을 묶은 발언문 수백 장을 손에 들고 다시 회의장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1시간쯤 후에 우리나라의 발언 차례가 되었고, 차석대사님이 앉으신 자리의 마이크에 빨간 불이 반짝하고 들어왔습니다. 차석대사님이 발언 말미에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마이크를 넘겨주시자마자 원고를 읽기 시작해서 정신없이 한 줄, 한 줄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정신이 깜빡 나갔다 들어온 것처럼 무아지경인 사이에 발언을 마쳤습니다. 큰 실수는 없었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대사께서 ‘잘 하네’하고 뒤에서 작게 칭찬해주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나마 긴장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발언이 있던 둘째 날의 가장 큰 사건은 청소년 대표들과 반기문 사무총장의 만남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럼, 넌 사무총장이랑 한국말로 이야기 하겠구나!’라며 다른 나라 대표들이 연신 부러워해서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러웠습니다.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반 총장의 자서전을 읽기는 했지만 실제로 뵐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환한 미소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오시는 모습에 마치 어렸을 적 읽은 위인전의 주인공을 본 듯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생각보다 키가 매우 크고, 하루 이틀 지으신 표정이 아니구나 싶을 만큼 미소가 자연스레 배어있는 온화한 표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한국 사람이에요?’하고 놀라시면서 매우 반가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고려대 학생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열심히 하세요’라며, 손을 꽉 잡아주셨는데 그 때 반 총장과 맞잡은 손, 그리고 저에게 보내주셨던 따뜻한 격려의 눈빛은 평생 잊지 못할 훈장처럼 가슴 깊이 남았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 제게 UN총회를 통해 느낀 것을 묻는다면 저는 한 마디로 ‘인간에 대한 신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느끼셨겠지만 국제회의가 재미있기만 한 것도 아니고, 국제기구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습니다. 저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각국 대표들의 발언을 듣고 있자니 지루했던 적도 있지만 문득 ‘이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거구나’라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무수한 동물 중에 인간처럼 전 세계에 퍼져있는 같은 종(種)들이 모여서 그들의 미래를 논하고 약한 존재들을 보호하기 위해 토론하며, 이 지구 전체의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체는 없으니까요. 200여개에 달하는 국가들이 똑같은 발언 시간을 가지고 평등하게 의견을 제시하는 이 UN 총회야말로 21세기의 진정한 아고라(agora)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가슴 뿌듯한 신뢰와 애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기 시작하자 그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할 수 있음이 감사하게 여겨졌습니다.

‘먹고 살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말이 절로 나오는 빡빡한 현실이지만 학우 여러분도 다양한 기회를 통해 이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희망의 무대에 조금 더 진출해보면 어떨까요. 20~30년 후에는 각 분야의 국제무대에서 훌륭한 고려대 학우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일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제 수기를 마치겠습니다.
                                          
※ 이 수기는 제가 참여한 회의에 해당하는 내용임을 밝혀둡니다. 비공식적으로, 혹은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기타 회의들도 매우 많고 각각의 성격은 모두 다릅니다.    

안이슬(미디어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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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6 18: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