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미국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며 뉴욕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 월가(街)에서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구호 아래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학력·저임금의 청년세대가 월가 자본주의에 반발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들은 “미국의 상위 1%가 미국 전체 부(富)의 50%를 장악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방값 걱정,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해 달라" 등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의도를 점령하라’ 라는 구호 아래 한국판 반월가 시위를 벌어졌습니다. 여의도에서 “탐욕스런 금융자본가들 공격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패한 금융자본가를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고, 노동·빈민단체들이 모인 빈곤사회연대도 서울역 광장에서 ‘1%에 맞선 99%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규탄 집회를 열었습니다.

또 어느 날엔가 뉴스에서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저기 먼 지구 반대편쯤에 있는 그리스라는 나라가 금융 위기에 빠졌다는 전언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그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된다고 한 소리 합니다.
문득 우리 과 학생의 한탄 소리가 들려옵니다. 부채만 1000만 원이랍니다. 학위와 스펙을 갖추고도 취업하는데 애를 먹는 우리 제자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소외감이 전해져 옵니다. 나비 효과라고 하나요? 이것저것 꿰어 맞춰 보니, 그 학생의 그 한탄과 저기 먼 그리스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와 반(反)월가 시위는 서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어느 날 지구 저기 먼 반대편 어딘가에 있는 일이 이제 우리 사는 이곳에 그대로 전해져 오게 된 것입니다.

한때, 글로벌한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에 자못 흥분한 적도 있습니다. 좋은 일들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세계를 보면 씁쓸해집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점점 공허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북한산을 걸어서 출근하다가, 불현 듯 시작된 가을의 절정에 들어 온 단풍든 나무들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단풍(丹楓)은 낙엽이 지기 전 나뭇잎에 숨어있는 색소 성분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뭇잎은 춥고 배고픈 겨울을 지내기 위해 스스로 낙엽과 고엽이 되는 것입니다. 단풍은 기후변화가 심할수록 일교차가 클수록 더 선명해진다고 합니다. 시련이 클수록 단풍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언덕배기 감나무에 매달린 감 익는 소리가 사르르 들리는 듯합니다. 은행잎은 눈꽃처럼, 꽃잎처럼 춤추며 흩날립니다. 활엽수의 붉고 노란 잎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집니다. 떨어진 잎들은 사람의 발길에 치이고 바람과 비와 함께 썩어 다시 나무뿌리에 자양분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나무는 버림으로써 나눠줌으로써 또 다른 채움을 얻습니다. 또한 그런 가을나무의 나눔으로 저 역시 채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을은 나눔으로써 비움에 드는 계절인 듯합니다.  

월가의 시위와 가을 단풍을 보면서 채움과 비움을 생각해 봅니다. 비움이란 생물학적 필요이상의 소유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발적 가난입니다. 그냥 버려서 얻는 경지가 아니라 제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눔으로써 비움에 드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남을 위하기 때문에 자기는 더욱 여유로우며, 남에게 주기 때문에 자기는 더욱 많아진다” 했습니다. 비운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자가 부자입니다.

단풍처럼 즐겁게 희생하는 마음, 시련을 기꺼이 맞는 마음을 한 가득 가슴에 채우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단풍나무 한 그루 세우시기를 기원합니다.

[탁류세평] 류태호 사범대 교수 체육교육과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7 02:4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