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

손병석,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 바다출판사, 2013.


의로운 분노는 건강한 사회의 ‘도덕적 바로미터’다



서양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감정은 무엇일까. 고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첫 문장이 “여신이여, 분노하라!”로 시작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이상 누구나 분노의 감정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듯하다. 이토록 연원이 깊은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고대인들은 어떤 견해를 지니고 있었을까. 최근 출간된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의 저자 본교 철학과 손병석 교수를 만나 서양 고대 철학자들의 분노에 대한 성찰을 전해들었다. 손병석 교수는 철학의 본고장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7년간 공부한 서양 고대철학 연구자다. 구법관에 위치한 손병석 교수의 연구실 벽면의 서가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를 비롯한 고대철학자들의 전집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최근 선생님께서는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을 출간하셨습니다. ‘고대인의 분노론’에 천착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원래 전공 분야가 서양 고대철학이고, 학부 핵심교양 수업에서 <고대 희랍인의 정의관>을 수년간 강의해왔습니다. 그래서 정의론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게 되었는데, 정의나 부정의와 관련된 밀접한 감정이 분노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분노에 대한 독립된 연구를 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내의 연구업적을 검색해보니 일천한 수준이었습니다. 아카데믹 컨트리뷰션, 즉 학문적 기여도가 높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분노론이라는 주제로 책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본 저서에서 선생님께서는 분노가 ‘사회적 구성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개인적인 감정이라 여겨지기 쉬운데 이 점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한 개인의 심리적, 생리적 현상으로 이해되는 것은 지나치게 좁은 해석입니다. 많은 경우에, 특히 고대 희랍로마 사회에 있어서 분노는 사회 정치적인 상황과의 역동적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었어요. 예를 들어, 호메로스라는 시인의 작품 『일리아스』에 나타난 아킬레우스의 분노나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분노를 보게 되면, 분노의 감정이 사회적인 반응으로서 구성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분노도 사회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 법정단의 판결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죠. 이때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소명은 불경건죄와 청년 타락죄였습니다. 기존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실체적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명확히 해명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활동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공분(公憤)에 주목하여 나름의 원인을 추적해보고자 했습니다. 예컨대, BC 411, 404, 401년에 아테네에서 과두정에 의한 민주정의 전복이 있었고 상당수의 아테네 시민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이때 평소에 정의롭지 않은 삶이나 선하지 않은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역설해왔던 소크라테스가 이 과두정에 의한 부정의하고 부당한 시민들의 살육이 있었을 때, 비판적이며 정의로운 소리 즉 ‘파레시아’를 내지 않고 철저하게 침묵 속에서 있었어요. 그래서 혹자는 “예수는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위해 울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 입장에서 봤을 때, 크리티아스나 카르미데스 같은 과두정 세력의 주동자들이 한때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었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간접적으로 과두정에 협조를 한 것으로 비추어졌어요. 이것이 아테네 시민들의 공분을 이끌어냈고, 그런 분노가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유죄와 사형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상당히 사회적인 반응(response)으로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분노의 감정은 현 시대의 어떤 사회정치적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을까요?

“한국 시민들이 분노도 사회 정치적인 이유와 밀접한 이유를 지닌다. 예를 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보여야 할 사회 지도자층이 탈세를 하는 불법적 비리를 범하는 것,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약속이 되어버린 많은 정치인들의 거짓된 약속, 또 어떤 국가의 공적인 권력 기관이 본래의 목표나 원칙에 맞지 않게 권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한국인들은 실망감을 넘어서 분노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본 저서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등 고대 철학자들의 저서에 나타난 분노론이 분석되고 있습니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고대인의 분노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분노를 제거하거나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를 이성과 조화시켜서 적절하게 순화시켜 잘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타락시아(무정념), 아파테이아(부동심)을 주창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고 자신의 영혼의 내면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것을 주문했죠. 반면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이성과 조화시켜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고 분노를 적절하게 교육시켜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좋은 감정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철학자들의 분노에 대한 성찰이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분노해야 될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은 노예와 다름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확장시키면 상대방이나 국가, 공권력에 대한 개인의 분노는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시키면 의로운 분노, 즉 의분(義憤)이 될 수 있어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것은 그 사회의 건강함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분노는 한 사회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도덕적 바로미터’가 될 수 있어요. 한 공동체가 건강함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부정의하고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는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학문을 하셨던 경험을 바탕으로 후학들에게 조언을 해주시고 싶은 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도 아직까지 경륜도 부족하고 공부도 더 해야 합니다. 책과 관련하여 보자면, 최근 학생들의 고민이 공적인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사적인 이슈, 진로나 취업 등의 문제에 치우친 것은 다소 아쉽습니다. 그런데 사적인 성격의 고민은 공적인 것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취업난이 심각한 것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성취하기 힘든 사회 경제적인 구조가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못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회 구조적인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 같은 경우 서양고대철학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만류를 많이 했습니다. 철학이라는 학문도 어려운 학문이고, 투자를 많이 해야 하지만 실용성도 없고, 투자 대비 아웃풋도 적습니다. 게다가 철학 분과 내에서도 국내에서 많이 연구된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희랍어나 라틴어와 같은 언어적인 장벽도 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걸어가고자 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길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실용적이지 않고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그 길이 가치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 분야에 대한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민서 기자 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6: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