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김한식·이경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향한 에움길


올해는 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태어난 리쾨르는 지난 2005년 타계한 사상가다. 현재 리쾨르의 사상은 철학은 물론이고 문학과 신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에서는 특히 신학 분야에서의 관심에 힘입어 상당수의 저술이 번역되어 왔다. 리쾨르는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근대 이후의 다양한 학문적 업적과 대화하며 자신의 사상을 확립해왔다. 특히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에서는 근대 이후의 방대한 지식을 끌어들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세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리쾨르는 보통 현상학적 해석학자로 분류되는데 그것은 그가 인간의 ‘자기 이해’가 텍스트 ‘해석’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60년대의 상징론, 70년대의 은유론, 80년대의 텍스트론 등을 거쳐 발전해왔다. 그의 유작인 󰡔기억, 역사, 망각󰡕에 나타난 후기의 역사철학에서도 리쾨르는 ‘글’이나 ‘말’을 해석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주체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고심한다.


인간의 시간은 이야기처럼 구조화된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출간된 『시간과 이야기』 3부작에서 리쾨르는 시간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전개한다. “인간의 시간은 이야기처럼 구조화된다”는 것이 그의 시간론의 핵심 테제이다. ‘인간의 시간’과 ‘이야기의 시간’을 겹쳐 놓으려는 그의 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이야기’를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쾨르에 따르면, 모든 ‘이야기récit’는 필연적으로 세 단계의 미메시스 과정을 거친다. ‘전형상화(미메시스Ⅰ)’, ‘형상화(미메시스Ⅱ)’, ‘재형상화(미메시스Ⅲ)’의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전형상화의 시간’은 이야기 이전의 경험의 시간이고, ‘형상화의 시간’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줄거리 구성’의 시간이며, ‘재형상화의 시간’은 이야기를 수용하여 기존의 경험에 변용을 가져오는 독서의 시간이다.

인간은 ‘형상화’ 과정의 매개를 통해, 이야기 이전의 경험의 시간을 추(追)체험하고 자신의 경험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비단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활동만이 아니다. 인간은 이미 타자의 언어로 질서지워진 세계에 탄생하며,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자의 언어를 ‘해석’하는 긴 우회로(detour)를 통해서만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후설을 위시한 현상학자들은 구체적인 경험의 맥락을 괄호 속에 묶는 ‘선험적 환원’을 통해 인식론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명징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리쾨르는 인간이 언어의 역사적 지평 속에서 존재하며 따라서 타자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은 ‘선험적 주관’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인간이 타자의 언어로 구성된 세계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타자의 언어에 대한 ‘긴 해독’의 과정을 통해 자기 이해에 이를 것을 촉구한다. 따라서 인간이 ‘이야기 이해’를 통해 경험의 지평을 확장하는 과정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며 ‘세계 이해’와 ‘자기 이해’를 심화하는 보편적인 삶의 과정과 동궤를 그린다.

리쾨르의 시간론과 이야기론의 접점은 일차적으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리쾨르의 시간론과 이야기론의 두 번째 접점은 인간이 지닌 ‘서술적 이해력’에 대한 리쾨르의 옹호에서 비롯된다. 『고백록』을 통해 시간에 대한 성찰의 어려움을 토로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에 드러나듯이, ‘시간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지난한 과업이 되기 쉽다. 리쾨르는 시간을 탐구하려는 형이상학적 시도가 철학사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시간’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주지 못한다고 본다. 리쾨르의 주장은 시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형이상학적 시도 이전에, 이미 ‘이야기’의 형식으로 시간의 세부적인 국면들을 탐지하는 기술이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토리를 따라가는 능력’, 곧 ‘서술적 이해력’은 인간의 근본적인 ‘선(先)이해’의 능력이며, 모든 인간은 이러한 능력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서술적 이해력’이 인간의 근본적인 능력이라고 해서, 그것이 고정 불변의 정태적인 능력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는 서술적 이해력 또한 역사성에 귀속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양태 또한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리쾨르가 제1장 ｢줄거리의 변모｣에서 서사 장르의 ‘전통성’을 주장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과 활동하던 다시 고대 그리스인들의 ‘서술적 이해력’의 수준과 20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서술적 이해력’의 수준이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한편 리쾨르는 제4장 ｢시간의 허구적 경험｣에서 현대소설에서 시간을 탐지하는 세부적인 국면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세 편의 소설(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훌륭하게 예증한다.


텍스트 앞에 선 인간

해석학자인 리쾨르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텍스트 앞에 선 인간’을 의미했다. 타자의 언어가 집적된 ‘텍스트’는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조건이며, 인간은 그 ‘텍스트’를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긴 우회로를 돌아서 오는 것, 모든 인간을 위하여 의미 있는 것을 보존하는 거대한 기억을 통해서 돌아오는 것”이라는 리쾨르의 언술에 드러나듯이 그는 ‘자기 지시적’이고 ‘자기 정립적’인 근대철학의 코기토 개념을 비판했다. 리쾨르에게 있어서 주체는 ‘타자의 언어’와 그것이 집적된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정초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시간과 이야기』에 제시된 세 단계의 행동의 미메시스가 또한, 결국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다다르기 위한 긴 에움길은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다. 『시간과 이야기』에 나타난 리쾨르의 사유는 ‘텍스트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변용되는 ‘독자 세계’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텍스트와 인간에 관계에 대한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9:5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