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노래, 혁명의 노래 국내편(2)]

김추자, ‘님은 먼 곳에’ (1970)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곳에 영원히 먼 곳에”


이경준(대중음악평론가)



육체의 판타지를 일깨우다

김추자 전에 혁명은 없었고, 김추자 이후에도 혁명은 없었다. 몸에 꽉 달라붙는 판탈롱 바지와 초점 흐린 눈빛. 그리고 그보다 더 요염하게 애간장을 녹이는 목소리와 골반을 뒤흔드는 과감한 무대 매너까지. 김추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모름지기 노래라는 건 “정장을 빼입고 나와 얌전하고 다소곳이 부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조신함을 생명과 같이 간직했을 여자 가수라면 더 그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추자는 통용되던 법칙들을 산산이 깨부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이나 회자될 에피소드를 남겨놓았다. 가령 “무대 위에 노팬티로 선다더라.”, “북괴가 잡입시킨 간첩이고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저 현란한 춤은 남파간첩끼리 주고받는 모종의 신호라더라.” 등이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진 뒷이야기들이었다. 어찌나 그녀에 대한 구설수가 많고 춤에 대한 임팩트가 컸던지, 부모님의 회상에 따르면 어른들은 그녀가 TV에 등장할 때면 거짓말 보태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렸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를 추억하는 연유는 따로 있다. 그녀는 자의든 타의든 메인스트림 내부의 저항적 아이콘이었다. 더욱이 1970년대라는 정황을 고려한다면, 이런 여가수가 툭 튀어나와 활약하고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여기 그녀의 대표곡 ‘님은 먼 곳에’를 끄집어내려 한다. 노래라는 것이 가수의 감정표출 수단만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욕망과 충동이 결합된 육체적 상관물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 그녀의 노래는 분명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녀의 세대를 직접 살고 노래를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음반과 영상을 통해 만나본 이 곡처럼 내게 ‘육체라는 이름의 판타지’와 대면하게 만든 곡은 없었다. 단순히 그것은 두성과 비음의 사용이라는 테크닉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노래는 목에서가 아니라 몸으로부터 빨려나오는 것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 곡을 들어보면 된다. “청자를 휘감아 버린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넘실거리는 음색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독창적인 그것이 아닌가. 은밀하고 황홀하게 남성을 유혹하는 이 가수의 이름은 김추자였다.

‘님은 먼 곳에’는 1969년 11월 처음으로 방송된 동양방송(TBC)의 주말연속극 주제곡으로 발표된 후, 이듬해 신중현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통해 세상에 정식으로 선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래를 최초로 제안 받았던 사람은 스탠더드 팝의 여왕 패티김이었다. 만약 그녀에게 이 곡이 같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스스로 갈 길을 찾아낸다.”는 속설이 그렇듯, 노래는 자연스럽게 김추자의 손으로 흘러갔고 폭발적인 반응을 수확하는 데 성공했다. 훗날 이 노래는 가사에 대한 저작권을 두고 법정공방을 빚게 된다. 우연히 TV를 시청하던 원곡의 작사가 유호가 방송에서 작사가의 이름이 신중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에 곡의 작곡가 신중현은 “당시 드라마 삽입을 위해 받았던 가사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자신이 고쳐 썼다”며 반박했고 공방 끝에 법원은 2006년 유씨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원래 예술엔 사연이 따라붙는 법이니까.


모든 것을 토해내듯 불러제끼다

모든 혁명이 때를 잘 만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혁명을 저버리는 일도 있고, 혁명이 시대를 앞서가는 경우도 있다. 그녀의 또 다른 곡 ‘거짓말이야’가 ‘사회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 당시 사회는 극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표현과 창작의 측면에서 예속되어서는 안 될 예술가들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억압의 시절’을 거슬러 올라 ‘금지된 것’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고, 이는 ‘님은 먼 곳에’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마음 주고, 몸도 주고, 꿈도 준다”는 가사를 그녀만큼 절절하고 비장하게 풀어낼 수 있는 가수를 떠올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과도한 노출이나 저급한 노랫말 없이도 그녀만큼이나 강렬하고 섹시한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수를 상상할 수 없다. 김완선과 민해경이 나타나기 전, 김추자가 먼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님은 먼 곳에’는 숱하게 리메이크되었다. 장현, 위일청, 조관우, 거미 등이 부른 바 있고, 이중 장사익의 버전은 제법 호평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R&B 가수 이하이와 크로스오버 테너 임태경이 이 곡을 꺼내들어 관심을 모은 바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여러 버전들을 수차례 검토해보았지만, 장사익을 제외하고는 나의 마음을 일정 수위 이상 충족시킨 가수가 없다. 지금 하는 말은 “하늘 아래 원본만큼 멋진 곡이 없다.”는 단언이 아니다. 얼마든지 원본과 맞먹는 재해석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곡은 평탄하고 말쑥하게 부르면 맛이 살지 않는다. 행여 누가 볼세라 금고 안에 꼭꼭 숨겨놓았던 욕망 전부를 토해내듯 불러야 하는 것이다. 그 정답을 이미 김추자가 보여준 바 있다. 날카로운 사회비판도 없고 음유시인의 우울한 서정과도 거리가 먼, 이 지독하고 육욕적인 노래가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전적으로 노래를 부른 가수의 힘이라 평가해야 한다. 촉수 예민한 사람들은 잠시라도 ‘압도될 수 있는 경험’을 주는 노래를 바란다. 노래가 예상 못한 둔기로 변해 자신의 머리를 가격하기를 꿈꾼다. 이 노래처럼. 단언컨대 한국 소울과 록의 역사에 기념비로 새겨질 ‘님은 먼 곳에’만큼 메인스트림 안에서 메인스트림을 해체하고 파괴했던 노래는 없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01:1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