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둘러싸고 있다’는 뜻 이상의 어떤 가치를 지닌 것은 이 공간이 기억과 관련되어 매우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인 사유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벌써 몇 해 전의 일이다.  

특강을 마치고 어중간하게 시간이 남아 그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꽤나 오랫동안 살았던 옛 동네를 둘러보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복학 이후에도 몇 년을 살았으니, 골목 이곳저곳, 상점 하나하나가 눈에 낯설지 않다. 헤엄치고 놀던 개천 위의 제법 큰 다리를 기점으로, 산 어귀까지 가파르게 나있는 큰 길의 막바지에 내가 살던 집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서울임에도 내 기억속의 이 동네는 시골에서 자랐다는 사람들이 제 고향과 결부되어 흔히 주억거리곤 하는 표현들만큼이나 촌스러운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70년대 후반에는 나무를 꺾어 ‘검’을 만들어 산적놀이를 했고, 가구가 하나 둘 늘기 시작한 80년대에는 때맞추어 들어선 재래식 시장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기웃거리곤 했는데, 아마 백두대간과 광장이라는 서점도 이 때 문을 연 것 같다.  

비교적 오래된 청조약국과 화랑문방구, 중고등학교와 더불어 생겨난 희망독서실과 우리오락실, 대학가가 활성화되면서 간판을 내건 이천당구장이나 허름한 건물지하의 모닝 듀나 ‘커피뱅크’ 같은 음침했던 카페들. 그뿐이랴? 큰길의 허리춤에 이르면 신림만화방이, 몇 걸음을 더 떼면 봄마다 그 목련이 화사하던, 마당 넓은 집이 어색한 품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이런 생각들이 옛 동네를 향하는 그날의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러다 동네 어귀에 가까워질수록 오랜만에 낡은 것을 다시 꺼내어 볼 때 흔히 품게 되는 기대마저 생겨나, 특강의 피곤함 따위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동네 앞에 당도한 나는 그러나 정작, 참담한 심정을 거두어들일 길이 없는 내 처지를 턱없이 변모해버린 서울을 과하게 탓하는 것으로 달래야만했다. 막연히 건물 몇 채가 헐리는 정도의 변화를 예상하고 있던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단일하고도 가지런히 정돈된 것이었다. 

지역이 통째로 유실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는 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서울 사는 사람이 어찌 거부할 것이며, 그런데도 한없이 잦아든 그날의 참담한 심경은 또 어찌 설명될 수 있을까? 

그 어떤 감정의 이입도 거부한다는 듯 하늘을 향해 도도히 뻗어대고 제 경계를 확장시켜놓은 공간, 옛 것이라곤 조금도남아 있지 않은 이곳에서, 아니 과거를 통째로 삼켜버린 이 꺽달진 괴물을 앞에 두고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억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건물이, 거리가, 가로수가, 광고 간판에 적힌 문구가 나에게 매일 말을 거는 것은 아닐까?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도시의 고층건물이나 앞 다퉈 달려있는 현란한 광고판들, 아니 도시 전체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 순간, 기억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시야에 포착된 풍경들은 나 모르는 사이에 의식의 한 컨에 수북이 쌓여간다. 

나를 둘러싼 모든 형태의 사물들이 기억을 불러내는 일을 내게 ‘행’하면서 제존재 이유를 외쳐대기에, 사각형의 투박한 아파트와 현란한 네온사인은 덩그러니 물리적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볼 때 낯설음이 뭉텅 묻어 나오는 것도 이 공간이 편향된 틀로 나를 길들여왔기에 생겨난 상실감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대도시로 변모한 파리를 산책하던 보들레르나 경성대로를 쩔룩이며 걷던 소설가 구보가 제 작품에서 길어 올린 것도 도시에 존재하는 새 풍경과 낡은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이네들의 마음에 한없이 내려놓은 독창적이고 기이한 감정, 즉 고유한 기억 아니겠는가?

조재룡 문과대 교수 불어불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