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회보가 주소를 찾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한참 늦게야 배달된 탓에 4.18과 관련된 내용이 채워진 4월호를 지난주에 볼 수 있었다.

‘4.18 혁명’ 속 고대 중심주의

가장 눈에 띤 것은 4월 혁명 과정에서 고대생이 주도한 4.18에 대한 호칭이 고대인 간에도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점이었다. 특히 한 칼럼에서는 ‘4.18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월 혁명을 ‘혁명’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도 학계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총체적 사회질서 전환을 수반하는 정치변혁을 지칭하기 때문에 혁명으로서 4월 혁명의 의의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시각이 있다.

그러나 4월 혁명은 우리 현대사에서 정권을 붕괴시킨 유일한 정치저항이었다. 비록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지만 4월 혁명 이후 연속된 사회변혁 과제와 결부해 볼 때 4월 혁명은 혁명적 가치를 갖는 거대한 시민저항이었다. 이점에서  1960년 4월 19일에 정점을 이룬 저항운동을 ‘4월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에 동의한다.

고대생이 주도한 ‘4.18 고대행동’은 4월 혁명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고대인은 스스로 이를 고대정신의 정점으로 자부했고, 객관적 정치사적 의의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4.18 자체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도한 고대 중심주의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이는 오히려 4.18의 가치를 희화화할 위험이 있다. 4월 혁명 과정에서, 4월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평가되는 ‘4.18 고대행동’만으로도 그 의의는 충분하다.

고대의 일그러진 자화상

고대인이 최근 우리사회에서 목격되는 고대의 ‘과잉’현상에 대해 자기성찰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근래 고려대는 대학의 경쟁지상주의를 선도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 몇 대 대학에 드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고, 주요 신문의 한 면을 통째로 사서 그리 논리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담아 세상을 술렁이게 한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이런 대학의 경쟁주의는 벌거벗은 이익과 맹목적 효율로 이루어진 시장판에 대학을 내맡기는 과정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100년 역사 속에서 누적된 ‘고대정신’의 실질적 경쟁력을 너무도 빠르게 해체시키고 허구적 수사로 가득찬 광고와 홍보 위주의 무책임한 ‘포장형 상업주의’를 지향한 것이 최근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그 와중에 막걸리의 역사를 폐절하고 와인의 역사를 새로 쓰는 코미디가 벌어지는가 하면, 요즘은 막걸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편승해 다시 막걸리 잔을 만지작거리는 참으로 고대답지 않은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은 고대 출신이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반길 만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집권을 마치 고려대의 집권으로 오인한 일부 구성원이 집단흥분상태에 빠진 모습은 보기 민망하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세간에는 유독 곱지 못한 고대의 이미지만 크게 거론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우리의 거울인지도 모른다. 이를 고대에 대한 세상의 질투쯤으로 해석하는 오만이 우리의 모습을 더욱 일그러뜨린다. 그야말로 100년 역사를 딛고 선 대학의 격조와거리가 멀다.

우리 대학에서 공부한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스포츠 스타를 내세우는 모습도 문제다. 이런 모습으로 얼마나 많은 고대인이 고대정신 쇠락과 우울감을 느끼는지 학교 당국이 감지해야 한다.

또 왜 고려대에서 녹색성장과 같은 정부의 구호를 공공연하게 제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1000년을 지향한다는 대학과 임기 5년의 정부가 동락하는 이미지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쇠락한 고대정신

세상에 ‘고대’가 넘치는 만큼 ‘고대정신’이 쇠락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고대인의 집합적 의식으로서의 ‘고대정신’은 고대인만의 구호가 아니라 사회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성립한다. 지난 100년 이상의 역사에서 고대정신은 지성주의와 열정주의, 윤리주의를 문화적 원천으로 정의성과 대중성, 역사성을 확보함으로써 사회적 혹은 민족적 승인을 얻어왔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 고대정신은 그 정당성의 기반이 훼손되어 위태롭기만 하다. 세계 100대 대학 혹은 50대 대학, 와인과 클래식의 향기, 명품 학생이라는 구호를 드러내는 천박한 일류주의는 고대정신의 대중성을 해체시켰다. 기업과 정부가 풀어놓는 돈의 향배를 쫓는 동안 고대정신의 정의로움은 사라졌다.

경쟁과 효율만능을 추구하는 무분별한 자기변신은 고대정신의 역사성을 단절시키고 있다. ‘민족을 버려라’는 레토릭은 이제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든 대학이든 연륜이 쌓이면 그만큼 품격이 올라가야 한다. 몇몇 평가기관의 양적 지표에 목을 매고 등수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경박한 궤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 가치를 생산하는 고대정신을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

몇 개의 지표로 고려대를 평가할 수 없다. 고려대가 생산하는 세계시민적 가치와 실천을 세상이 감동적으로 승인할 때 진정할 평가가 이뤄진다.

강이 깊을수록 물은 고요히 흐르는 법이다.

조대엽 문과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