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노동과 성적 억압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기본소득

신철규 자유기고가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원에서 펴내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0권 제2호(2013.5)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를 새롭게 진단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2007년 발발한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가 지속되면서 좌파 담론의 초점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반자본주의, 탈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이번 호의 특집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대안 사회의 기획 중 하나로 기본소득을 다룬다. 본지에서는 강남훈, ｢불안정 노동자와 기본소득｣과 박이은실, ｢성체제와 기본소득｣을 소개한다. 강남훈의 논의에서는 불안정 노동자의 소득보장정책으로 선별소득보장보다 기본소득이 우월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더 실현 가능할 수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이은실의 논의에서는 기본소득이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의 우위뿐만 아니라 인간적 관계의 개선,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해소하고 성체제의 변혁에 기여할 수 있음을 전망한다.



비정규직의 철폐와 완전고용을 위하여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불안정노동자와 기본소득｣에서 우리나라처럼 불안정노동자가 경제활동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제에서 불안정노동자의 소득보장정책으로 선별소득보장보다는 기본소득이 더 적합함을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강남훈은 ‘모든 국민들에게 무조건적이고 개별적으로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이 노동시장에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시장을 안정화하고 소득 재분배를 가져올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 글은 우선 우리나라의 불안정노동자의 현황을 살펴보고, 마찰이 있는 경우와 마찰이 없는 경우로 나누어 선별소득보장정책과 기본소득정책의 일반적 비교를 시도한다. 이러한 비교를 바탕으로 두 정책 중 어느 것이 진정으로 불안정노동자를 위하는 것인지 불안정노동자의 유형별로 그 효과를 분석하고 기본소득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정리한다.

불안정노동(precarious work)은 직업 안정성, 임금, 사회보장의 수준이 낮고 해고에 대한 보호 장치가 없으며, 직업 숙련도 및 작업장 안전도가 낮고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을 말한다. 이러한 불안정노동의 상황에 있는 노동자들은 지구화, 시장만능주의 정책, 서비스 산업의 비중 확대, 정보기술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들을 ‘불안정노동자 계층’ 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불안정노동자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실업자와 숨은 실업자 등이 포함된다.

2012년 3월의 통계에 따르면, 불안정노동자의 규모는 1702만 7천 명으로 이는 사실상 경제활동인구의 62%를 차지한다. 비정규직은 최근 완만하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정규직 임금은 비정규직 임금의 2배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남훈은 김유선의 논의를 빌려, 비정규직이 차별과 초과착취의 대상이며 차별과 초과착취의 결과가 저임금과 임금 격차라고 주장한다. 또한, 영세자영업자는 정규직뿐만 아니라 비정규직보다 소득이 낮은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실업자는 취업과 실업 사이를 이동하면서 직업의 불안정성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강남훈은 이러한 통계를 바탕으로, 국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소득과 자산 등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완전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마찰이 없는 경우’뿐만 아니라 이와 반대인 ‘마찰이 있는 경우’에서도 선별보장은 소득재분배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기본소득은 소득재분배를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 마찰이 없는 경우 조세 차등은 소득재분배 효과가 있으며, 조세구조가 누진적일수록 기본소득으로 인한 수혜 계층은 더 늘어나는 반면 최상위계층의 부담은 더 커진다. 고소득 계층이 보편복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들의 부담이 커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효과는 선별보장정책에서도 획득 가능하다.

하지만 완전한 정보가 없고 행정비용이 드는 현실의 상황에서는 선별보장정책을 가지고 기본소득과 동일한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선별소득보장은 행정비용이 많이 들고, 혜택의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자신의 소득과 자산을 속이는 도덕적 해이가 나타나며, 소득 역전을 노리는 전환 효과가 발생할 수 있고, 노동 유인의 감소가 크며, 낙인 효과가 있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할 수 있지만 조세 부담의 총액이 크다는 문제가 있다. 강남훈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선별소득보장이 기본소득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대중적 판단이 우세한 데는 조세와 보조금이 함께 결합된 정책에서 조세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손실 회피(loss aversion) 성향을 극복하고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반이 훨씬 넘는 가구에 순수혜택액이 확실하게 부여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강남훈은 이어서 불안정노동자의 구성과 유사한 가상적 모델을 만들어서 불안정노동자를 위한 여러 가지 소득보장정책을 비교한다. 실업자에 대한 대표적인 선별소득보장정책으로 실업보험과 실업부조가 있는데, 이러한 정책의 문제는 정부 지원을 늘리기 위해 납세 계층의 부담을 증가시키며 기업이나 근로자가 부담하는 고용보험료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실업자들이 낮은 임금의 일자리가 생기더라도 거부하는 복지 함정과 비경제활동인구가 실업자로 전환하는 도덕적 해이이다. 또한 영세자영업자에게만 보조금을 지급할 경우 하위 비정규직이 영세자영업으로 전환함으로써 노동 인력이 감소하고 영세자영업자들 간의 과당 경쟁을 유발할 수 있으며, 비정규직에게만 보조금을 지급할 경우 비정규직이 고착화되거나 기업이 보조금만큼 임금을 인하하는 모순적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처럼 불안정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경우에는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것이 선별소득보장보다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강남훈은 주장한다. 기본소득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불안정노동자에 대한 소득보조인데, 기본소득은 소득보조로 인해 복지 함정에 빠져 노동 유인이 사라지거나 소득역전으로 인한 경제활동 전환을 가장 줄일 수 있는 정책이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은 비정규직 철폐 정책에 도움을 준다. 만약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거부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기본소득은 완전고용 실현에 도움을 준다. 첫째, 노동시장의 구조를 개선하고, 둘째, 노동자들은 기본소득을 바탕으로 다양한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며 직업 선택의 폭 또한 확대된다. 이는 실업률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셋째, 기본소득은 노동시간 단축(일자리 나누기) 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이와 같이 기본소득은 완전 고용을 위한 다른 정책들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이 글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유용성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정의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도 기본소득이 실현되어야 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즉, 기본소득이 지급되므로 생존을 위해서 차별과 착취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면 우리는 차별과 착취에 저항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기본소득 정책을 실시하는 데 걸림돌이 될 고소득 계층의 반발을 어떻게 무마할 것인지, 그리고 정책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합의의 도출을 위한 비용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없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주체성을 획득하고 저항할 수 있는 물적 조건에 대해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여성의 남성과의 협상력을 높여야 성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는 가능하다

박이은실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의 ｢성체제와 기본소득｣은 ‘여성=성적 대상≠인간’ ‘남성=성적 주체=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기본소득 논의가 ‘물적 자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논의는 ‘좋은 삶’의 조건으로서 ‘관계’의 문제를 다룬다. 즉,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적정한 물적 자원의 확보가 관계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페미니즘 논의들이 기본소득을 다루는 데 있어 노동의 문제에 천착했다면 관계의 문제를 함께 고려함으로써 논의가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보고, 기본소득을 비정규직, 성별분업, 돌봄노동을 중심으로 논의할 때 간과될 수밖에 없는 이성애적 전제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박이은실에 따르면, 현재의 성 체제는 ‘여성=성적 대상≠인간’ ‘남성=성적 주체=인간’라는 도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여성은 인간 주체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채 남성인 인간 주체에 향유되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현재의 성 체제를 유지하는 틀이라는 것이다. 남성은 생계부양자, 여성은 피부양자로 사회적 위치를 한정하는 것은 이러한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역할의 분리는 중상층 이상의 계층에 한정되어 있으며 실제로 중하위 계층의 여성들은 생계부양자인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부양적 위치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여성이 피부양자라는 사회적 위치로 한정됨으로써 그녀들은 남성보다 더 낮은 임금과 더 심한 고용불안정을 강요당한다. 이는 남성이 담당하는 일은 고평가되고 여성이 담당하는 일은 폄하되거나 저평가되는 전반적인 남성중심적 문화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성적 우열의 체계에서 남성은 성의 소비자가 되며 여성은 성의 공급자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은 자신의 몸을 ‘느끼는 몸’이 아니라 ‘느껴지는 몸’으로 수동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에서 ‘남성=생계부양자/여성=피부양자(혹은 2차 생계부양자)’라는 도식은 남성이 성적 향유를 할 수 있는 물적,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마련하고 유지하는 기제인 동시에, 여성의 주체적인 성적 향유를 가로막는 기제로 작용한다. 연애관계 안에서 발휘되었던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 결혼에서는 동일하게 발휘되지 못하는 것은 이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박이은실은 이러한 성적 차별과 억압을 기본소득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기본소득이 모든 여성들의 경제력을 무조건적으로 일정하게 보편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여성이 남성중심적 결혼제도나 고용제도를 통해 경제력을 확보할 수밖에 없어 발생하는 남성과의 낮은 수준의 협상력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해방(자위권) 사이의 연관성을 밝힌 기존의 페미니즘 논의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본소득은 성별분업의 해체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주체성 획득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데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무조건적인’ 혜택이라는 기본소득의 정신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을 넘어 여성 내부의 차별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균열을 불러오려면 기본소득의 액수가 생계비를 충당할 만큼 충분한 소득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보장된다면 생계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향유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협상력이 현저히 증가하게 되고 이는 여성의 주체적 결정권을 확보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여성=성/남성=인간’이라는 도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성 체제를 해소시킬 수 있는 급진적 돌파구로서 기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07:0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