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外, 『필경사 바틀비』, 한기욱 역, 창비, 2010.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김홍경 (자유기고가)


허먼 맬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한 변호사가 바틀비라는 필경사를 기억하고, 그 기억의 방식으로 쓴 전기(傳記)형식의 소설이다. 바틀비는 상사인 화자의 명령에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로만 대응한다. 여기에서 ‘바틀비적 저항’이라는 고유 명사가 등장한다. 점입가경으로 그는 더 이상 화자의 사무실에서 필경사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고 사무실을 점유한다. 이것은 일종의 파업인데, 고용주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행해지는 보통의 파업과 다르게 그 어떤 목적도 없다. 그는 필경사의 일을 하지 않으면서 화자와 사무실을 공유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를 포기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사무실을 떠나야 한다는 화자의 요구에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화자는 그를 해고하지만 그는 해고 뒤에도 사무실에 남아서 기거한다. 화자는 그를 몰아내는 대신에 사무실을 이전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그는 화자가 떠난 후에도 사무실을 점유한다.

훙미로운 부분은 사람들이 이토록 무기력한 바틀비에게 “폭도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데 있다. 바틀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하나의 체계, 법에 순응하지 않는 개인에 대해 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불쾌함이나 두려움을 상징한다. 허용되지 않는 ‘가만히 있음’ 조차도 하나의 시스템에는 위협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내내 바틀비가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의 저항은 화자를 비롯한 인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바틀비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지만 하나의 ‘법적 개인’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그 숱한 ‘그래야 함’에 저항한다. 바틀비는 우선 이 건물에서 살면서 “변화를 안 겪”은 채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바틀리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런 욕망을 중재하고 간섭하려는 사람들의 말에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답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국 바틀비는 격리시설로 호송된다.

바틀비는 격리시설의 높은 벽을 향해 얼굴을 돌린 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밥조차 먹지 않는다. 그는 생, 그 자체에 저항한다. 그는 더 나은 길을 찾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몰아닥치는 그 하루하루를 묵묵히 버텨낸다. 거듭되는 단식으로 그는 죽는다. 그의 죽음은 자살의 한 방식처럼 보인다. 그의 자살은 격리시설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필경사 사무실로 온 그 날부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화자를 포함한 어느 그 누구도 왜, 무슨 이유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영원히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죽음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겨버리고 만다. 화자는 그를 알아챌 기회를 잃어버린다.

화자는 그를 그저 맴돌 뿐이었다.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관심을 두고, 그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했으면서도 그는 바틀비에게 다가가는 것에 실패했다. 바틀비의 중심에는 다다르지도 못한 채, 한 없이 망설이면서. 그의 주검 앞에서 화자는 그의 몸을 만져보라는 환청을 듣는다. 살아있을 때 바틀비는 그의 말대로 유령 같은 사람이었다. 창백하게, 온기가 소거된 사람. 화자는 그런 바틀비의 손을 만진다. 영원히 손에 닿지 않을 것 같던 타인, 한없이 자기 방어적이기만 한 화자에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바틀비의 손은 그를 전율에 떨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말이 온당한 것일까. ‘정말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상식이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아’라는 말 속에서 상대방의 수많은 스펙트럼은 소거되어 버린다. 우리는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로를 더듬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주고받는지도 모른다. 길을 걸어가면서 잠시 잠깐 스친 얼굴을 종이 위에 완전히 그려낼 수 있을까. 차라리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이 문장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기억을 적어나가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 바틀비는 반쪽짜리 얼굴로 화자의 노트에 발걸음 한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04:0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