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사운드]
시각적 매체라고 받아들여지는 영화 매체에서 청각적 요소는 어떤 지위를 갖는가.
들리는 것이 자율적으로 살아날 때, 보이는 것의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무엇을 하는 소리인가

남다은(영화평론가)

무성영화기의 이론가들은 영화의 사운드를 2차원적인 이미지에 3차원의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 여겼다. 스크린 위에서 영화의 이미지는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층위로 재생산하지만, 사운드는 그러한 변형 없이 그대로 옮겨진다는 점에서 영화의 음향은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완성”(루돌프 아른하임)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힘은 매체의 결함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아른하임을 비롯한 1920년대의 이론가들에게 음향의 도입은 영화의 예술적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서 사운드의 역할을 폄하할 수는 없다. 다만 유성영화 시대에 이르러, 고전영화의 사운드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언제나 이미지와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가치를 지녔음은 어느 정도 사실이며, 이미지에 ‘부합하는’ 사운드의 역할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다. 쉽게 말해, 사운드는 이미지에 종속되어 그 이미지의 환영성을 강화하고 서사의 보다 매끄러운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를테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은 인물들의 내면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배경음악을 통해 영화 속 세계에 감정적으로 동화된다. 의미전달과 소통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 영화의 사운드가 영화 속 이미지의 다층성 혹은 모호함을 일견 평면화하고 이해 가능한 의미로 환원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단정하고 넘어가기에 영화와 사운드의 관계는 복잡한 층위의 질문들로 엮여있다. 우리의 귀에 들리는 저 사운드는 영화 속 세계 안에서 나오는 것인가,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인가. 저 사운드의 주인, 혹은 그것을 발생시키는 몸을 프레임 안에서 볼 수 있는가, 없는가. 지금 저 사운드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의 움직임, 상황, 내면)와 일치하는가, 어긋나는가. 달리 말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고전영화들, 혹은 오늘날의 상업영화들에서 조차)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질문을 불러오며, 때로는 감독의 의도를 넘어서는 불가해한 감각의 층위를 영화에 부여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의 사운드에 관한 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언제나 던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누구의 소리인가?(혹은 누구의 소리라고 규정하는 게 가능한가?) 무엇을 하는 소리인가? 그것이 배경음악이건, 인물의 목소리이건, 그 세계의 잡다한 소리이건, 영화의 사운드는 이미지를 단순히 설명하는 영역이 아니라, 실은 이미지와 충돌하거나 넘어서고, 쇼트와 쇼트의 간극을 벌리기도, 좁히기도 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환기하고 생성하는 영역이 될 수 있다. 대개 우리가 걸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은 사운드를 도구화하지 않으며, 단지 보이는 것의 강화가 아닌 보이는 것 이상의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힘이 사운드에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일찍이 <사랑은 비를 타고>(1952)라는 영화에서 우리는 육체에 종속되지 않는 목소리의 파급력을 경험했고, 수많은 공포영화 걸작들에서 인간의 입이 아닌 다른 신체적 기관에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의 강렬함에 몸서리친 적이 있을 것이다. 또는 이미지를 설명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교란시키는 소리들, 언어적 질서를 파괴하는 소음과 비명의 위력 또한 알고 있다. 영화와 사운드에 대한 탁월한 분석가, 미셀 시옹은 󰡔영화의 목소리󰡕라는 책에서 어쿠스메트르(acousmêtre)라는 신조어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에 대해 말한다. 이 역시 이미지에 속한 목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미지가 속한 세계를 주관하는 능동적인 사운드로, “도처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 소리 안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 소리의 정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불러오는 불길함, 두려움, 영화적 긴장, 매혹이 여기 있다.

그러니 위의 무성영화 이론가들이 영화의 사운드가 영화에 2차원적인 이미지로는 도달 불가능한 (현실인 체 하는)환영을 구축한다고 비판했다면, 적어도 오늘날 그 말은 이렇게 고쳐져야 한다. 영화의 소리는 이미지의 세계를 ‘현실처럼 모사’한다는 점에서 환영적인 게 아니라, 현실에서는 쉽게 감각할 수 없었던 세계의 지평을 확장하고 ‘들리는 세계를 본다는 것’이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지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환영적이다. 그리고 그 환영은 시각적 세계를 하나의 의미로 통합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다층화하고 의미의 공백을 찾아내고 의미와 충돌하며 우리의 닫힌 현실세계의 문들을 영화적으로 활짝 열어준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15: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