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노래, 혁명의 노래
윤심덕, ‘사의 찬미’ (1926)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이경준(대중음악평론가)



두 예술가, 현해탄에 몸을 날리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과 필적할 만한 혁명이 또 있을까?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아이를 둔 극작가와 자유분방한 연애를 꿈꾸었던 소프라노의 만남만큼 극적이고 체제저항적인 사랑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예술과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았던 두 눈빛은 어느덧 자신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벽과 충돌한다. 선택지는 몇 없었다. 그에 굴복하여 용인되는 삶을 살아가거나, 혹은 승인되지 못한 사랑을 잠시 유예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거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그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지극히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카드를 집어 들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는 관부연락선에서 현해탄을 향해 몸을 던진 것이다. 차디찬 물결이 곧 둘을 덮었다. 서른 살 동갑나기 예술가 커플의 비극적인 연애담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들의 로맨스를 지켜주려는 듯, 결국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출발부터 아픔을 잉태하고 있었다. 국비장학생으로 동경음악대학에 입학한 인텔리 윤심덕. 그리고 뼈대 있는 집안의 아들로 역시 일본에서 문학을 공부한 김우진. 애초부터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김우진은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둔 유부남이었기 때문이었다. 1921년, 그들은 일본유학생들이 결성한 극단 모임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당시 까칠하기 그지없던 지식인 김우진에게 윤심덕은 높디높은 자존심과 엘리트의식, “무작정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하루 동안이라도 내가 끌리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겠다”는 시대를 앞서간 남성관으로 무장한 신여성의 형상으로 다가왔다. 그는 첫눈에 이 여성에게 반하고 만다. 윤심덕에게 김우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미 자신에게 구애했던 남성들을 차갑게 뿌리친 바 있었다. 콧대 높은 성악가의 눈에 조무래기들이 성에 찰리 없었던 것이다. 김우진 역시 순박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고 있었지만, 가업을 강요하는 집안의 경직되고 고압적인 분위기에 물릴 대로 물린 상황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했던 여자와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픈 남자. 끝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강력한 추동. 그것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렇게 둘은 곧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열애로 빠져들었다.

윤심덕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부잣집에서 자라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식을 남녀구별 없이 평등하게 교육해야한다는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 음악을 전공할 수 있었다. 남동생과 여동생 역시 피아노와 성악을 택할 정도였으니, 집안 내부에 예술가적 DNA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민요와 판소리가 지배적이던 당대의 음악적 토양에서 클래식을 수학한 그녀가 나아갈 길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아 보였다. 재능을 알아봐줄 전문가도 부재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섭외한 무대에 서도, 그녀에게 돌아온 말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윤심덕은 ‘불륜녀’라는 딱지 말고도 이곳저곳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사의 찬미’, 태어나다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김우진 역시 그녀의 옆을 스쳐간 수많은 남정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조잘댔다. 동대문 갑부이자 희대의 엽색가 이용문과의 스캔들(그녀는 동생들을 유학보내기 위해 그와 잠시 연애를 했다) 또한 여러 뒷말을 낳았다. 아마 윤심덕은 당시 조선백성들 사이에서 가장 입방아에 많이 오르내렸던 여성이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숨 쉬는 것조차 벅찬 고단한 현실에서 자신에게 유일한 탈출구로 다가왔던 남성. 그러나 그는 그녀의 구원이 되기엔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 즈음부터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26년 7월, 윤심덕은 음반을 취입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위에 그녀 스스로가 곡을 붙였고,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았다. 인생사의 회한과 덧없음, 살아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그려낸 4분여의 이 짧은 노래는 실은 윤심덕 자신의 삶을 반영한 자전적 노래였다. 곡을 완성한 뒤, 그녀는 연인 김우진에게 “이리로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협박조의 전보를 띄운다. 잔뜩 겁을 먹은 김우진이 그녀를 찾아왔고, 둘은 1926년 8월 1일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 도쿠주마루에 오른다. 그리고 며칠 후, 둘은 증발하듯 몸을 감췄다.

그녀가 취입한 레코드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호사가들은 그들의 죽음이 실은 음반을 팔아먹기 위한 음반사의 계략이었으며, 둘은 죽지 않았고 이탈리아로 넘어가 잘 살고 있다고 수군거렸다. 이 이야기가 얼마간 설득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진실은 저 너머에 존재했다. 한국 역사상 가장 큰 파장을 몰고 왔고, 가장 많은 소문을 동반했던 연애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문화와 예술을 허락하지 않던 소멸의 땅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저항의 몸짓으로 시대를 거절했다. 물론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이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한정된 시시콜콜한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나는 그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혁명이란 본디 아주 은밀한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이 남긴 자취엔 비의가 있다. 성의 있는 작품은 가감 없이 그 현장을 담아낸다. 예술이 성취해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 바로 그것임을, 심미안 가진 사람들은 예리하게 포착해왔다. ‘사의 찬미’가 그 순간 중 하나임에 나는 조금의 의구심도 없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13:4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