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 구성원에 의한 성폭력, 어떤 논의가 필요한가?

최영지(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성폭력 가해자가 내부 구성원이라는 현실은 성폭력 가해자는 낯선 이라는 통념이 깨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곤란함을 안긴다. 만약 대학에서 외부인의 침입으로 인해 구성원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쉽사리 대대적인 학내 경비 강화와 보호 담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피해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고민을 가지고 사건을 신고할 수 있을 것이고 학교는 밤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또는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 대한 안전을 위해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경비를 강화할 것이다. 또한 선후배나 동기들이 혼자 어두운 길을 가야하는 친구를 데려다 주고자 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부 구성원에 의해 성폭력이 발생한 것은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보호와 통제라는 방안이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성폭력이 내부인이 아니라 모르는 외부인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주변인이 가해자가 될 경우를 상상하지 못한다. 성폭력의 80% 이상이 아는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발표되어온 연구 결과이지만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어긋나기 때문에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만 잠시 언급되었다가 곧 사라진다. 따라서 성폭력 가해자가 내부 구성원인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은 매우 낮다.

또한 성폭력은 여성 비하 발언, 음담패설, 성별화된 젠더 역할에 대한 강조와 같이 매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은 배제되고 통제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범죄로서만 부각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성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성폭력’이 일어나면 이에 대해 대응하고 신고해야 한다는 것은 배우지만 그것이 어떤 성폭력을 말하는 것인지, 누구에 의한 성폭력을 말하는 것인지, 누가 얼마만큼의 책임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갖지 못한다. 이는 만약 누군가가 어떠한 분위기나 언행에 불쾌함이나 수치심을 느껴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주 좁은 의미의 명확한 ‘성폭력’이 아니라면 문제제기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며 심지어 그러한 문제 제기자에 대한 비난과 배제(사회적 처벌)가 동반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성폭력에 대한 내부 구성원들의 대응력을 떨어뜨리고, 단지 해당 사건이 우리가 생각하는 ‘성폭력’이 맞는지, 내부인인 가해자가 정말 ‘성폭력 가해자’가 맞는지, 가해자 처벌의 수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이렇게 학교 내에서 성폭력 사건은 수십 년간 벌어져왔지만 별개의 사건으로 처리되고 기억되어왔으며 성폭력이 발생하는 문화에 대한 공동의 책임성이나 변화에 대한 고민 등은 축적되지 못했다.

성폭력 사건들이 개별화되는 것의 문제점은 199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생기기 시작한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상담소, 양성평등 상담소, 인권센터 등의 역할이 전혀 강화되지 못한 채 존재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국내 대학에 성폭력 사건을 상담하고 지원할 수 있는 기관이 생긴지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상담소들은 인력 부족과 독립적 영향력 부족 안에서 허덕이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가 공동체 내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이들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에 이에 책임이 있는 학교는 학내 성폭력 상담소들이 사건을 쉽고 빠르게 최소한의 잡음을 가지고 처리하는 역할을 하는 기구로서만 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가해자 처벌에 대한 독립적이고 일관적인 권한조차 가지지 못한 이러한 기구들이 실제로 사건을 만족스럽게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며 이러한 상태의 성폭력 상담소들은 구성원들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폭력을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학내 문화에 대한 다수의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곳일수록, 구성원들에게 성별화된 젠더 역할을 요구하는 곳일수록 성폭력이 발생할 확률과 은폐될 확률이 모두 높다. 이러한 곳일수록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논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성원들을 침묵 속으로 밀어 넣는 일방적인 화합에 대한 강요,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 부재, 불쾌함을 농담이라며 사소화 시켜버리는 문화, 피해자가 아니면 나서지 말라거나 예민하다는 비난 그 자체를 예민하게 바라보고 이러한 문화에 대해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또한 성폭력에 보다 건강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사람들은 같이 생각을 해보고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내가 성폭력 피해자라면, 가해자라면, 피해자나 가해자의 주변인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좋을지에 대해 혼자가 아니라 보다 많은 구성원들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무런 준비 없이 성폭력 사건을 마주하는 것보다 대응력을 높일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성폭력은 현재 매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이다. 또한 가해자 역시 내 주위의 평범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상에서의 성폭력 발생을 낮추기 위해 어떤 문화가 필요한지 우리가 모두 논의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개별적 사건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성폭력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과 실질적인 변화에 대한 노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12: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