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약방문식의 반성폭력 대책 반성해야


고려대는 지난 8월 5일 ‘최근 일련의 (성범죄) 사안에 대한 본교의 방침’이라는 제목의 보도 자료를 배포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안을 엄격하게 처리하겠다는 본교 방침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성범죄 대책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켜 실질적인 예방책을 강구하겠다. 앞으로 (성범죄) 가해자에 대해서는 △신속성 △엄정성 △공정성의 원칙을 갖고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전했다. 고려대학교 당국은 반성폭력 대책을 세운 이유로 이 문제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성폭력적인 학내 문화 조성’이나 ‘성폭력 피해자 보호’와 같은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사회적 물의’라는 모호한 정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고려대학교 내의 성폭력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고려대학교반성폭력학생연대(이하 ‘학생연대’)가 2012년 9월 한 달간 실시한 고려대학교 구성원의 성 인식/실태 설문조사를 보면 여학생의 7.1%가 학내에서 신체적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피해자들은 학교로부터 제도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다. 성폭력 가해자/피해자 분리 원칙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작년에 벌어진 의대생 사건, H교수 사건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와 주변 인물들로부터 제 2차, 3차 피해를 겪었으며 교칙에 명시된 사건처리과정 90일을 훨씬 넘는 시간 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에 학생연대는 2006년 개정된 후 바뀌지 않은 성폭력 관련 교칙의 개정을 학교 측에 수차례 요구한 바 있다.


현행 반성폭력 학칙의 문제점


2006년에 개정된 현행 학칙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가해자와 그 주변 인물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 현행 학칙은 가해자/피해자 분리 원칙조차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가 성폭력상담소에 피해 사실을 신고한 순간부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해야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가해자가 교수인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와 분리되기 위한 요청을 해야 하는 상대가 가해자이거나 부재한 경우가 있었다. 또한 행정적인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행정적 문제’라는 이유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 고립되기도 했다. 성폭력 피해자 A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양성평등센터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자에 대해 직무정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적어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강제성 있는 조항이 필요하다.

또한 성폭력 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학내 성폭력 사건은 학생과 관련된 경우가 많고, 교수들로만 이루어진 위원회는 사건 해결에 있어서의 민주성을 보장할 수 없다. 교수의 경우 학생보다는 교수의 입장에서 생각할 여지가 있으므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라도 학생 위원이 최소 1인 이상 필요하다. 현재 경희대학교, 서강대학교, 연세대학교, 한신대학교 등에서는 대표성과 형평성의 측면에서 학생대표가 성폭력 진상규명에 참가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학내성폭력 문제는 사후약방문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폭력 문제는 성인식, 성문화의 문제와 직결된다. 성폭력적인 문화가 만연한 공간에서 성폭력이 발생하고, 2차 3차 가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성폭력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폭력의 문제라는 기본적인 교육이 제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이상 성폭력 문제는 뿌리 뽑힐 수 없다. 2012년 학생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90% 이상의 고려대학교 구성원들이 반성폭력 교육 자체의 필요성을 긍정했지만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반성폭력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간 저평가되었던 반성폭력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제도적으로 반성폭력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인권위’)의 2012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대학의 약 70%가 학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다른 대학의 현 상황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2012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성희롱 성폭력 상담소를 두고 있는 대학은 전체 대학의 약 26%에 불과하다. 상담기구의 연간 예산도 1천만 원 미만인 경우가 60%에 달한다. 피해자 치료지원과 법률자문은 전체 대학의 약 50% 정도에서만 실시하고 있다. 상담기구에 별도의 인원이 배정된 경우는 전체 대학의 약 7%로 21개 대학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학에서는 성폭력 상담사가 일방행정과 상담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학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 예방교육은 전체 대학의 약 70%가 실시하고 있으나 상담기구에 별도의 인원이 배정되어 있는 경우는 전체의 약 7%로 21개 대학에 불과하며 나머지 90%의 대학에서는 일반행정과 상담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피해자 보호 및 지원과 관련하여 학내 상담실에서 피해자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심리/정서적 지원(39%)이 가장 많으나 서비스를 통한 지원에 비해 실제 경비를 지원하는 경우는 매우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은 사회 전반의 인권문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공포와 불안 조장이 아니라 성문화를 바로 잡아야 한다. 여성주의저널 일다의 최영지 씨는 (처벌만 하면 성폭력 범죄 예방될까? 2012/09/05/www.ildaro.com)한국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시각은 엄벌주의 대 온정주의로 양분화 되어 나타난다. 엄벌주의 시각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르는 사이이고, 피해자가 아동이거나 장애인과 같이 객관적인 약자라고 여겨질 때, 성폭력 범죄 가해자에 대한 공분과 함께 극단적인 처벌을 요구하는 시각이다.

온정주의는 이와 달리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는 사이이고(80%정도의 성폭력 범죄는 이러한 관계에서 벌어진다), 피해자가 성경험이 있거나 성인인 경우, 그리고 가해자가 평소 ‘바른 생활’을 했다고 할 경우 ‘가해자가 고의도 아니었고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용서해 주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성폭력을 사소한 것으로 용인하는 시각을 말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양분화 된 시각은 성폭력 피해자를 가부장제 아래에서 지켜야할만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으로 나누기 때문에 존재한다. 엄벌주의와 온정주의는 가부장적 기준에서 나온 시각이기에 둘 다 문제적인데 한 쪽 시각을 강화할 경우 다른 쪽 시각 역시 강화되는 효과를 보인다. 따라서 성폭력 가해자를 사형시켜야 한다!와 같은 가해자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주장들은 사실, 모든 성폭력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지켜야할만한 대상에게 폭력을 휘두른 가해자에 대한 주장이며 온정주의를 동시에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다.


성폭력은 성추문으로 명명될 수 없다


주요 일간지와 티브이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뉴스의 제목으로 ‘고려대학교’와 ‘성추문’이라는 두 단어를 강조했다. 이른바 ‘명문대’라고 불리는 학교가 ‘성추문(sex scandal)’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성추문’은 ‘성과 관련된 추잡하고 좋지 못한 소문’을 이르는 말이다. 성폭력 사건을 뭉뚱그려 ‘성추문’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성폭력’을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낯부끄럽고 추한 문제’ 정도로 인식하는 사회적 통념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어느 언론도 중고등학교 학내 폭력 문제를 다루면서 ‘학내 추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폭력 문제는 결코 ‘성추문’으로 명명될 수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의 문제를 ‘추문’으로 호도하는 태도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피해 경험을 신고한 피해자의 자리를 삭제하고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사회적인 맥락을 지운다. 학내성폭력 문제는 ‘학교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나 ‘몇몇 비도덕적인 개인의 문제’로 명명될 수 없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09:3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