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묘약

선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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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밤의 골목길을 자주 걸었다. 여름밤이 너무나 더웠고 방에 앉아 여름의 열기를 견디기도 힘들어서 산책을 나섰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동행하는 이들과 함께 골목길을 걸었다. 서울의 골목들을 걷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창문에는 아픔의 내력들이 새겨져 있다는 생각, 함부로 그 창문을 열어볼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산책하는 이가 주택가의 창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듯이, 어떤 타인의 삶의 질곡들은 쉽사리 들여다볼 수는 없는 채로 우리에게 남겨진다. 누군가의 창문은 삶의 끝자리에 이르기까지 닫힌 채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관계의 법칙이다.

서울의 골목에는 유난히 크고 작은 점집들이 많았다. 선녀님, 보살님, 장군님을 몸주신으로 섬기는 무당들이 서울의 골목들마다 자리를 틀고 있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국면을 주도할 수 없으며 갑작스러운 모퉁이처럼 삶은 전환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또한 관계를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엄습하는 사건과 사고들 또한 준비하지 못한 채로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삶을 통제하겠다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삶의 약자들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서울의 골목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린 점집들이 유난히 많았다. 우리는 강해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때로는 가장 약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서울의 골목들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 보면 동행하는 이들과 발걸음이 어긋나는 순간이 많았다. 각자의 리듬으로 길을 걷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까. 길고양이의 리듬, 주행하는 자동차의 리듬, 그리고 보도를 따라 걷는 행인의 리듬까지, 우리는 모두는 당연하게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을 지닌다. 그러나 문득 동행하는 사람들과 나의 발걸음이 겹쳐지고, 지나가는 길고양이의 발걸음까지도 함께 조화되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걸음을 닮아가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여름밤의 행방이 문득 묘연해지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문득 반쯤 열린 창문이 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밤의 훈증할 만한 열기가 창틈으로 스며들 때, 우리는 각자의 리듬 속에서 진동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란히 서서 서로의 리듬에 섞여들 준비를 하게 되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여름밤, 골목길에 나란히 열린 창문들은 그런 미약한 희망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무덥지만 청신한 여름밤의 나날들이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07: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