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발언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양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비행사가 어린 왕자에게 그려줄 수 있는 양의 그림이란 겨우 구멍이 뚫려 있는 상자 일 뿐이다.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 그림은 중절모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형태에 맞게 보아뱀과 코끼리를 그려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상자 속 양은 그저 육각형 모양 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양을 생각할 수 있다. 어린 왕자가 싫어했던 병든 양이나, 뿔 달린 양이 아닌 가장 정상적인 양... 그러나 그 양은 항상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인 양을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누구에게나 똑같은 모습은 아니다.

올해가 다 지나가지 않았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수많은 비행기들이 떨어졌고, 세월호는 가라앉았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나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다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했고, 내게 있는 빚을 생각하면서 돌아오는 학기에 할 수 있는 조교 일이나, 파트타임 잡을 알아보고 있다. 나는 단지 양일뿐이다. 나는 어떤 상자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보이지 않는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양이다.

야밤에 핸드폰이 울린다.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 받기로 결심한 찰나, 벨소리가 멈춘다. 금융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인데, 가끔 술을 마시고는 제 풀에 못 이겨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는 한다. 전화를 걸었더니, 회사 생활이 힘들었는지 대뜸 이대로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던진다. 그러니까 이렇게 돈에 얽매여 다른 사람들 밑에서 평생 일하다가 죽을 것 같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대학원을 생각해보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럼 대학원 오면 뭐가 있대? 넌 돈이라도 벌지.”

예전 다니던 회사를 생각해보면, 나는 다시 선택지에 놓인다. 회사를 다닐 것이냐 아니면 그만 두고 대학원을 다닐 것이냐의 문제. 이미 끝나버린 선택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선택지에 몰두하게 된다. 얼마 전, 장례식장에서 전 회사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직속 상사였던 분인데, 내가 속해있던 인터넷 방송팀이 회사와 독립이 되어 케이블TV 방송국이 되었다면서, 조금만 참지 그랬냐는 말을 한다. 그 순간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만 말해두어야겠다. 그 친구처럼 매번 같은 업무에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만두어야지’ 하는 생각이 월급날만 되면 마법처럼 사라지는 그런 반복들을 그만두어야했다. 생각해보면, 그 때는 월급이라는 목표가 있기라도 했던 것이다.

삶은 목표로 이루어져있다. 그렇게 보면 삶이라는 녀석은 양이다. 보이지 않는데, 계속해서 상상해야하는 동물이다. 대학원생인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제 나이가 있어 취직은 어렵고, 계속해서 박사과정을 진학해야하는가의 문제가 괴롭히고 있으며, 그렇게 진학하고 나면 강사 자리 하나 잡을 수 있을까의 문제, 그리고 과연 나의 꿈은 교수인가의 문제들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 미래를 상상하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만 한다. 나는 공부하는 것이 즐거워서 대학원을 온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회피로서 유예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이 질문들일 뿐이며, 나는 온전한 답 하나를 제시할 수 없다. 오로지 상상만 가능할 뿐이고, 계속해서 어떤 선택들을 하고 있다. 그 선택들이 옳았는지는 결국 나중에 가서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가? 미래에 의해 평가당하는 내 삶은 정당한 것인가?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양이다. 그 양은 상자라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 갇혀있다. 생텍쥐페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낭만적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상자들 속의 양들을 상상하는 것. 마치 저 하늘의 별을 보면 그 별 중 하나에 장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별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당신들이 아름답고 당신들에게 나 또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당신은 나를 상상할 수 있지만 나는 당신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양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23:0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