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과 'A' 사이에 놓인 거리
- 경계와 소통에 대한 잡념

이후경 영화평론가



10일전, 서울을 떠나 런던에 왔다. 1년짜리 석사 과정에 지난 5년간 이리저리 모은 돈의 팔할을 쏟아부어 얻어낸 유학생 신분이다. 그러고나니 혼자 힘으로는 생활비 마련이 쉽지 않아 계란 한판 나이에 아버지에게 손까지 벌렸다. 동생에게 듣기로는, 결혼의 'ㄱ'자도 꺼내본 적이 없는 이 과년한 딸의 혼수 자금으로 묻어놨던 통장을 건네고 난 며칠 후, "우리 딸들은 왜 남들처럼 버젓한 회사에 취직해서 결혼하고 애 키우며 평범하게 살지 못하나"라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셨단다.

그런 아버지의 탄식과 바꿔치기한 1년이기에 그 결과물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받아 박사 과정도 밟고 학위도 딴 뒤 한국으로 돌아가 적당한 대학의 강사로 시작해 교수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딸이 그만한 재목이 못 된다는 것은, 당신 역시 지난 30년간 몸소 깨달으셨을 바다.

차라리 영상이론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영화에 관한 깨달음을 찾아 떠난다는 이상주의적 목표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출국 몇주 전, 함께 영화를 공부한 동기 친구들이 송별회를 해주었다. 한 친구가 물었다. "너는 영화이론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술기운에 호기롭게 대답했다. "아니. 있다고 해도 영화를 잘 느끼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가 될 확률이 높은 것 같아." 경솔하고 위험한 주장이었지만, 철회하고 싶진 않았다. 영화이론'과'의 소용성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란 체험을 통해서 배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체험을 누가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누가 누구에게 영화를 배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유학을 선택했는가. 구태여 변명하자면, 영화를 더 깊이 느끼게 하는 체험이 영화 안에도 있고 영화 밖에도 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다. 그래서 한쪽의 폭이 넓어지면 다른 한쪽의 폭도 함께 넓어지곤 한다. 한쪽이 어떤 틀 안에 갇혀있으면 다른 한쪽도 어떤 틀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유학생을 빙자해 이방인으로 생활해보는 일은 '나'의 경계를 깨트려주고, 무르게 하고, 비틀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고작 그런 일에 돈낭비를 하고 있느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나중에 어떤 형태로 분화할지 모를 고작 그런 경험을 구매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상품이 요즘 시대에 '레어템'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게 시작한 1년 중 첫 10일간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것을 느끼고 있다. 경계를 넘어가는 일은 경계를 확인하는 일이다. 전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앉아 있는 교실, 선생님이 '소통'을 강조한다. 유럽 이론과 아시아 이론 사이에 수평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오영강 연출, 완령옥 주연의 1934년작 <신녀>가 상영되는 동안 긴 한문 자막이 나올 때마다 알아들었니 못 알아들었니 수근대고 키득대는 일부 영미권 학생들을 보노라면, 대화의 기대는 잦아든다. 문득 장률 감독의 말이 떠오른다. "영화는 문화가 달라고 소통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글쎄요. 전혀 소통할 수 없어요. 그건 개소리예요." 모든 작품에 적용 가능한 명제는 아니나, 경청할 말이다.

소통의 가치는 과대평가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는 현실을 대체하기 위한 환상으로서의 소통의 역할이 과대평가되어 있다. 그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생각이란 교환 가능한 것이라 여기게 한다. 하지만 '1'을 '1'로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수치화된 상품뿐이다. 기억, 체험, 사랑, 믿음 같은 것들을 나누는 일은 때때로 'ㄱ'과 'A'를 서로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지만 결국 다른 것임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감내하는 일이다. 그 가운데 가끔 무언가가 기적적으로 교감되는 것 같다. 소통은 그렇게 불통의 자장 안에서 불현듯 반짝인다.

좋은 영화와 좋은 감상도 그런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정한석 기자의 다음 말을 좋아한다. "나는 반드시 영화가 아닐지라도 진실로 뛰어난 창작품들이 대개 양식적으로 일정한 감상의 저항선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게 그 작품들을 보편타당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창작자의 특수한 표식이며 그것으로 저항감도 일어나지만 또 그 저항감을 넘어설 때야말로 우리의 감상은 어떤 최상의 상태에 이르게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경계 위에서 어렵사리 이루어지는 지극히 개별적인 만남들을 구하는 일이 어떤 보편타당한 이론을 이해하는 일보다 좋은 지적, 육적 실천인 것 같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05:0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