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나무와 그 호랑이

- 윤리적 실천조차 곤란해진 ‘지금’에 현기증을 느끼며

이후경 영화평론가



여러 달 전, <혹성 탈출: 반격의 서막>을 보다 엉뚱한 장면에서 사레들렸다. 전반부에 말콤(제이슨 클락)이 마지막 남은 발전 수단인 댐을 찾아내기 위해 홀로 유인원 마을을 향할 때다. 거칠게 다듬은 목재들로 만든 개선문 같은 것이 보이자, 불안감을 주는 배경음악이 흐르고, 그 뒤로 엄청난 크기의 고릴라 한 마리가 나타난다. 영화와 음악이 겨냥한 감정은 인간보다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고릴라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한데, 예상치 않은 잡념이 끼어들었다. 캐나다 삼림지역 어딘가에서 실제 야외 촬영을 한 3D 영화라던데, 저런 장면을 한번 촬영할 때마다 숲이 얼마나 망가졌을까? 캐나다 정부는 숲 속 로케이션 촬영을 유치하면서 대해 제대로 된 규정을 적용했을까? 차라리 모든 것을 디지털로 그리는 편이 저 나무들에게는 훨씬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군도: 민란의 시대>를 볼 때도 비슷하게 산만해진 장면이 있다. 도치(하정우)와 조윤(강동원)이 대나무 숲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다. 두 사내가 현란한 동작을 선보이며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를 때마다 둘 사이에 놓인 대나무들이 하나 둘 베이며 힘없이 쓰러지는데, 줄거리에 몰입하지 못하고 ‘애꿎은 대나무들은 무슨 죄인가’ 하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느닷없이 죽음을 맞닥뜨린 대나무들은 얼마나 황당했을 것이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대나무들은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까, 난데없이 대나무의 안타까운 운명을 슬퍼했다.

이같은 잡념이 풀리지 않는 딜레마로 이어질 때도 있다. 작품의 미학과 제작의 윤리가 충돌할 때다. 개인적으로 사무치게 좋아하는 3D 영화인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물보호의 관점에서 보면 다분히 섬뜩한 작품이다. 미국 개봉 후 실제로 촬영 중 호랑이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구설수가 나돌기도 했다. 설령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야생동물들이 통제된 환경 속에서 지정된 동작을 할 수 있을 만큼 길들여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극단적인 예로는, 태국의 관광명소로 잘 알려져 있는 호랑이 동굴 사원을 들 수 있다. 우유를 먹여 얌전하다는 호랑이를 직접 만져볼 수 있게 해주는 이 절은 최근 동물 학대와 불법 밀매의 온상으로 부상했다. 영화 속 호랑이가 호랑이 동굴 사원의 호랑이들처럼 다뤄졌을리는 없겠지만, 인간의 야만적인 문명사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진 못할 것이다. 이렇듯 영화는 세상의 오물 속에서 스스로 뒹굴며 탄생하는 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건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환경운동가가 할 법한 소리’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슬그머니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 둘의 역할이 본질적으로 대단히 다른 것인가? 환경운동가가 지구의 생태계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영화평론가는 영화의 생태계를 걱정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은가?

영화계의 생태가 아니라 영화의 생태계다. 전자가 인간중심의 생산 및 소비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후자는 그 시스템을 둘러싼 인간적, 비인간적 환경 전반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맥락에서는 영화 노동자의 삶의 질이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후자의 맥락에서는 동물 배우들의 노동 조건, 영화 홍보에 소요되는 자원 낭비, 재현 이미지가 촉발하는 신자유주의적 욕망에 대한 비판까지도 논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기록하고 모방하고 상징하고 은유하고 재현하는 대상과 방식에 대해 폭넓게 사유해야 하는 영화평론가의 역할은 환경운동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마치 우리 뇌의 신경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세계 속에서 ‘윤리적인 선택’은 늘 자기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에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뜻하는 ‘비건 vegan’을 검색하면 ‘비건이란 존재할 수 없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 vegan’란 제목의 이미지가 뜬다. 소 그림 위에 소의 각 부위를 재료로 한 수많은 공업 화학 재료를 나열해놓은 그림이다. 소를 직접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소를 소비하지 않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이처럼 인간의 손에 의해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낱낱이 분해되어 자본주의적 상품 속에 스며들어있는 지금, 영화와 영화를 만들고 소비하는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의 윤리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기가 힘들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2 13: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