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연구환경] 이공계 대학원생은 누구인가?

어느 이공계생


대학원생은 높은 확률로 심각한 인권 침해와 과도한 노동, 업적 강탈, 가난 등 한국 사회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온 몸으로 체감한다. 스스로가 두려운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공계 대학원생은 누구이고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전 "스스로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이공계 대학원생은 '이공계 대학원생'이라는 특수한 존재라고 스스로 인식하지만, 이는 이중의 ‘일반적인’ 정체성이 중첩된 것일 따름이다. 우선 이공계 대학원생은 노동자다. 하청 연구 노동을 하며, 그 노동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자신이 노동자라고는 말하지 않는데, 이러한 인식이 없이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할 수가 없다. 사실 노동권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생존경쟁밖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이공계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질 기회는 좁다. 대신 회자되며 실제로도 나타나는 ‘특수한’ 관계는 도제 관계이다. 교수는 생활비를 보조해주는 대신(이마저도 '빚'이라는 제도 때문에 생활비를 온전히 지불해줄 필요가 없다), 교육과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연구 및 서류 작성 노동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이공계 대학원생은 도제 관계에 놓여 있는 '반쯤 노예인 제자'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다. 이는 자기 계발 논리와 약간의 레드 콤플렉스에 의해 쉽게 정당화된다(어떤 사람의 경우는 개인의 희생으로 국가를 부흥해야 한다는 신념도 끼얹어서).

한편, 이공계 대학원생은 말 그대로 학생이다. 학생은 학문 생태계의 일원으로써 학습권이나 ‘학문의 자유’ 등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 요구 배경은 학과나 연구실마다 다른데, 첫째, 기업이나 국가의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수주하는 곳으로, 자본의 입장에서 주류와 그 주변부이다. 대학원생은 프로젝트의 주 수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 및 반영하기 어렵고, 프로젝트 관련 서류 업무의 과도함으로 인해 학습권을 침해 받기 일쑤이다. 게다가 프로젝트의 기한은 최장 2~3년이라 졸속 연구를 강제 받는다. 둘째, 자본의 입장에서 배제된 곳으로, 구조조정으로 통폐합에 놓일 위기에 있는 학과이다. 학업 수행 여부가 불투명하며 재정적으로 더 어렵다. 셋째,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지만 연구 전망이 없는 학과이다. 재생산이나 활용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기에 각종 연구 성과 제도와 징계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 이들은 자본의 이해 관계에 맞는 교육 제도 및 기관 편성과, 양적 연구 성과의 강제로 요약된다. 학문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에게 해당되는 문제로 ‘교수의 도덕성’이나 ‘기관의 횡포’로 일축되는 것이 아니며, ‘자본에 대한 학문의 우위’를 요한다.

물론 두 일반적인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힘을 모으고 요구를 관철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 이전에 문제들을 일종의 '현실 원칙'과 같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이나 기관의 비정상성으로 한정해버리는 이들에게 "학생과 노동자로써 요구를 하자"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리이다. 실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물리력과 같은 어떠한 매력 요소가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이공계 대학원생은 노동자임을 인정하며, 다른 한편 적어도 교육 및 학술 기관에서는 ‘자본에 대한 학문의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두 일반적인 정체성을 드러낸다면 연대의 범위도 넓어지며, 적이 누구인지도 어떤 요구를 할 것인지도 선명해질 수 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2 21: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