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칼럼]

이공계 대학원을 나서며

어느 이공계 졸업생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나는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다. 공대생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학부에서의 배움은 뜬구름 잡기이자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나는 더 배우고 싶었다. 학부생이었던 나는 박사과정까지 마치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 논문과 연구실적을 뒤져가며 내가 갈 만한 연구실과, 내가 배움을 얻을 만한 지도교수를 찾았다. 학교에서는 4학년 학부생이 교수와 함께 연구를 진행해서 실적을 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나는 거기에도 의욕적으로 참가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연구실에 들어가니 연구실 선배들이 하나 같이 ‘왜 대학원에 오느냐’, ‘지금이라도 다른 곳에 가라’며 부정적으로 말했다. 물론 당시의 나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어디에 가든 사람하기 나름이니 잘 버티겠다고 다짐하며 선배들의 말을 웃어넘겼다. 그러나 이후 나는 박사과정에 입학하지 않았고, 내가 들었던 말들과 똑같은 말을 후배들에게 하며 대학원을 떠났다.

대학원생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돈 문제이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흔히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보수를 받으므로 그래도 살 만할 것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연구실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이러했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고 2년 동안 평일에는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출근해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퇴근했다. 토요일에는 같은 시각에 출근해 저녁 6시 이후에 퇴근했다. 일요일에는 출근하지 않았다. 이렇게 연구실에 매여서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받는 돈으로는 등록금도 충당할 수 없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생활비는 어떡하나. 차라리 시간이 많았다면 과외나 여타 다른 알바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힘들었다.

돈이 없다 보니 나는 산학장학생에 신청했다. 돈이 없을 때 이공계생들은 종종 산학장학생에 지원하기도 한다. 산학장학금을 받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교수에게 알리지 않았다. 기업에서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석사졸업 이후 박사과정에 입학하지 않고 회사에 취업할 것이라고 예상되므로, 교수들이 차별대우를 하기 때문이다. 교수 입장에서는 박사과정에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 원생들을 더 챙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기업에서 장학금을 받는 이공계 원생들의 심리는 복잡하다. 일단 돈이 급해서 이후에 입사할 것을 전제로 기업에서 돈을 받았지만, 학문의 뜻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닌 것이 나의 마음이었다. 임금을 통해 즉각적인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대학원생은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학원생의 두 번째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첫 번째보다 더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문제다.

대학원에 들어가면 깊은 학문적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석사과정 신입생이었던 나는 아무 것도 몰랐으므로 교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대학원에 갔던 것이니까. 우리 연구실에서는 일정한 주기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세미나의 시스템은 이러했다. 원생이 기존에 하던 양식대로 세미나 내용을 준비해 간다. 교수가 그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원생이 대답하지 못하면, 교수가 차분하게 혹은 다혈질적으로 지적한다. 나는 점차 교수에게 지적을 받지 않는 스킬을 익혀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흔히 대학원의 문제로 경직된 도제 시스템을 꼽는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도제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 이공계 대학원이다. 도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려면 교수들이 연구 중심적으로 살아야 하고 학문적 깊이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교수들은 학문 중심적이기보다는 프로젝트 중심적이다. 연구실에 특정한 연구주제에 관한 지속성과 정통성이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교수가 박사에게, 박사가 석사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구조가 마련돼 있을 것이라 나는 기대했지만 막상 대학원에 가 보니 교수는 윤곽만 손봐줄 수 있을 뿐이었다. 대학원은 학교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인처럼 개인이 노력해서 연구하고 실적을 내는 구조였다. 프로젝트에 휘둘리다보니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할 시간도 없었다.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니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배움에 대한 나의 진정성을 지키기에 더 좋은 게 대학원의 현실이라면 나는 계속 대학원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학계에서의 생존전략을 익히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 아니었다.

교수는 내게 박사과정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지만, 석사과정을 마친 나는 기업에 입사했다. 대학원에 돈과 시간과 미래까지 판돈으로 건 사람이 보기에 나는 내 살 길을 찾아 약삭빠르게 떠난 속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학문과 배움에 매혹되었을 뿐, 대학원의 명성과 구조에 매혹된 적은 없는 나의 이야기도 대학원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4:5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