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이 흘렀지만 오월은 다시 찾아왔다. 광주 시민들의 피와 눈물을 머금고 꽃 피운 민주주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월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정경대 5.18 민주화운동 역사기행 ‘오월을 걷다’에 동행해 20여명의 학생들과 이틀을 함께했다.

오월 영령이 깃든 5.18 민주묘지

16일 오후 4시, 광주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도착했다. 기행단은 ‘민주의 문’과 ‘추념문’을 지나 참배광장에 이르렀다. 십이지신을 하나씩 두른 기둥이 그들을 맞았지만 첫 십이지신인 쥐와 마지막 십이지신인 돼지가 그려진 기둥은 없었다. 설동연 정경대 학생회장은 합동참배를 위한 헌화에 앞서 기둥의 의미를 설명했다. “시민을 향한 첫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아직도 수많은 실종자와 무명열사가 남아있습니다. 열 개의 기둥은, 시작을 알 수 없는 5.18 민주화운동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합동참배를 끝낸 후 둘러본 묘역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묘역은 참배객들에게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눴던 그 날을 차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고등학생부터 구두닦이까지, 부당한 국가에 저항하며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어준 ‘열사’들은 다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5.18 시민군을 이끌며 이런 유언을 남긴 윤상원 열사의 묘소 앞에서는 모두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민주묘지 한 편에 위치한 5.18 추모관은 항쟁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피가 흥건한 도청 계단의 모습과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넋이 나간 4살 아이의 사진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기행단원도 있었다. “35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오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너무 많은 흙먼지들이 발생하고 있잖아요.” 박병찬(정경대 행정14) 씨에게 광주에 오게 된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 흙먼지들을 덜어내고 직접 5.18을 느껴보고 싶어서 기행에 동참했어요. 지금의 이 마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여전히 오월을 품고 있는 전남대

전남대에 도착하니 오후 7시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학생회관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기행단은 강당에 둘러앉아 간단한 자기소개와 자신이 바라는 기행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노유진(정경대 정외14) 씨는 기행단원들이 현대에 이르러 5.18 정신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우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5.18은 추모의 대상으로 박제돼버렸어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5.18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는 어떻게 오월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요.” 오월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 기행단은 전남대 5.18광장에서 열린 5.18 전국대학생 문화제에 참가했다. 애국가가 울리자 시민을 향해 발포한 상황을 재연한 연극과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시민군 생존자의 증언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어요. 국가가 내 가족과 친구를 난데없이 ‘빨갱이’로 몰아가며 죽이는 모습을 봐야만했던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사생결단의 항쟁을 했던 겁니다.”
다음 날 오전 9시부터 기행단은 전남대 곳곳의 사적지를 둘러봤다. 항쟁 10주년을 맞이해 사범대 건물에 그려진 벽화에서 교육민주화를 주장한 교수들을 기리는 교육지표 사건 기념비까지, 기행단은 여전히 기억되는 오월의 가치를 마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전남대 학생이었던 윤상원 열사 기념비와 박관현 열사 혁명정신 계승비 주위로는 이따금씩 ‘오월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전남대 탐방을 마친 기행단은 버스에 올라 박관현 열사의 이름을 딴 ‘관현로’를 지나 전남대 정문을 나섰다. 전남대 정문 옆으로는 이곳이 오월 항쟁의 시작점임을 알리는 사적비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월의 금남로에서 5월의 안암로로

금남로는 5.18 전야제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5월 18일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던 금남로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부당한 군사정권을 향한 투쟁의지를 불태운 ‘항쟁의 거리’이기도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오월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금남로는 오월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기행단은 네 팀으로 나뉘어 금남로 일대에 흩어진 5.18 사적지를 찾아 미션을 수행했다. 5.18 당시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화된 광주MBC 옛터에서는 라이터를 한 번에 켜는 미션을, 당시 소식을 ‘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던 녹두서점 옛터에서는 3개의 투사회보를 순서에 맞춰 나열하는 미션을 진행했다. 각 팀은 1시간 안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적지를 찾기 위해 숨 가쁘게 뛰어다녔다. 뜨거운 햇빛 아래, 금남로는 각자의 방법으로 오월을 기억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고 기행단은 안암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김대용(정경대 정경15) 씨는 잊혀가고 왜곡되는 오월의 모습이 씁쓸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오월 당시 광주는 고립됐었잖아요. 그런데 지금도 그 고립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5.18을 두고 폭동, 빨갱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17일 오후 7시, 안암로에 도착한 기행단은 민주광장에서 해산했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18일. 축제로 휩싸인 민주광장 너머 정경대 후문에는 A4용지 두 장이 붙었다. “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아직, 벌써,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날.”
오월 광주에서 돌아오니, 이곳은 5월이었다.

글·사진 | 김범석 기자 conan@kukey.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4 10: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