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은 교수 (문과대 한국사학과)

정부와 여당의 중·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전환 방침의 강행 결정을 알리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간 역사학계와 교육계는 정부와 여당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체제로의 전환방침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연이어 발표해 왔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1400여 명에 달하는 초등학교 교사, 2200여 명이 넘는 중등교육 역사교사와 6개 지역의 교육감들, 각 대학 역사학 교수들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들이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심지어 평생 한국사 연구에 헌신하여 역사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원로 교수들까지도 각자의 정치관과 역사관의 차이를 뒤로하고 함께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의 국정화 강행 발언은 지금까지 나온 각계의 목소리를 전혀 경청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수많은 학계와 교육계의 전문가 그리고 시민들의 행동을 ‘바보들의 행진’으로 만든 셈이다.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기반 한 국가에서 집권 세력이 당리당략을 얽매여 민의를 외면하거나 왜곡하면 국가와 사회의 분열과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한국현대사는 이를 여러 차례 확인시켜 주지 않았던가. 지금 누가 바보들의 행진을 하는가.

역사교과서 집필에 대한 정권의 개입과 역사교육의 자의적 왜곡은 이전 정부시기부터 ‘착실’하게 진행되어 왔다. 2011년 지난 정부는 역사교과서에서 친일파청산 및 민주화운동 관련 내용의 축소를 시도했고, 2013년 현 정부는 검인정 과정을 파행으로 몰아가며 자신의 역사관을 충실히 반영한 교학사 교과서를 승인했다. 그러나 사실오류와 왜곡으로 점철된 이 교과서는 학계와 교육계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 교육현장에서 철저히 외면 받았다. 이에 정부는 2014년부터 검인정제 활용방식을 폐기하고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역사학계와 교육계가 국정화로의 회귀를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부의 개입을 핵심으로 하는 국정화 제도하에서는 언제든지 특정 정권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역사 교과내용이 재단되는 상황이 초래될 여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일방적인 태도는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국정화로 인해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의 근본 목표가 무너질 수 있다. 역사학의 목표는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이해에 갇힌 사고를 키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이와 정반대이다. 역사학은 구체적 사실 속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변화의 요인과 계기를 파악해 시대의 특성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 기본적으로 탈 이념적이다. 셋째, 160명이 넘는 고려대 교수들이 동참한 반대성명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조치는 민주공화국의 헌법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지난 1992년, 국정보다 검인정제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데 적합하다는 헌법재판소의 지적은 이와 같은 우려를 반증하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당리당략을 위해 ‘역사’를 동원한 소모적인 정쟁을 집요하게 일으키는 것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냉전적 역사관’으로 21세기를 이끌어 갈 세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여당 대표가 ‘좌편향 된 역사교과서의 획일화된 역사관’으로 학생들이 선택의 자유를 침해받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정화 조치를 단행해야 함을 주장했다고 한다. 2013년 9월 그가 새누리당 근현대사 역사교실을 발족하며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선포한 사실까지 상기한다면 현 국정화를 추진하는 이들은 한국사를 철저하게 ‘좌우 이념대립’ 구도, 달리 말하면 ‘냉전적 사고’에서 이해하는 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념대립에 기반을 둔 역사관은 ‘획일적 역사관’을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극히 단순화 시키고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 뿐이다. 한반도는 자본주의, 파시즘, 공산주의가 대립하고 공존하며 전개된 20세기 역사를 가장 격렬하게 겪었던 곳 중 하나였다. 이러한 역사 전개 속에서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선 민족운동가들은 민족문제 해결과 국민국가 수립에 구심력으로서 보다 원심력으로 작용한 이념 대립을 뛰어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열강이 강요한 식민지배와 식민지주의 그리고 냉전분단체제와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고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념대립에 입각한 역사관으로 어찌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해 만든 ‘신간회’를 설명할 수 있으며, 반공주의자인 김구가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을 단행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냉전분단시대조차 좌우이념 대립구도에서 동북아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시기는 매우 짧다. 1960년대 후반 정부의 안보담당자들마저도 미소 양진영의 대립구도로 세계질서를 파악하는 방식은 적실성이 없다고 보았다. 하물며 지금은 탈냉전이후 새롭게 맞이한 21세기이다. 동북아를 포함한 전 세계질서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급속히 변화하며 새로운 질서 형성을 위해 요동치는 시기인 것이다. 이념대립이 이러한 변화를 추동하고 있지 않음은 중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세대’가 과거처럼 열강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억압과 빈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각자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나아가 남북대립 극복과 동북아 평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지식과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는 주체여야 한다. 당연히 이를 위한 기반 조성은 현 기성세대의 의무이다. 특히 냉전시대를 경험한 기성시대가 처리해야할 주요한 과제는 역사이해나 현실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퇴영적이기만 한 냉전 이념적 역사관을 불식시키는 것이다. 역사를 이념으로 재단하여 현실권력의 유지를 위해 소모적인 논쟁 일으키며 양극화와 저성장의 현재 앞에서 힘들어 하는 미래세대의 발목을 다시 잡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세대는 그들의 가치관과 힘으로 그들의 국가를 만들어 갈 것이다. 기성세대는 최대한 좋은 토대만을 제공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의 상식을 거스르는 시대착오적인 국정화 강행을 당장 중지하기 바란다. 소모적인 이념 논쟁과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상황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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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5 19:54:59: